[위클리 리포트] 일상에 스며든 스테이블코인
수수료 없이 수 분 내 송금 가능… 은행보다 높은 예치 금리도 장점
기업들, 수출입 대금-급여로 활용… 일부 국가선 통화 가치 저장 용도
‘달러 연동’ 테더-서클, 시장 주도… 美 국채 1283억 달러 보유 ‘큰손’
美, 관련 법 마련 등 시장 확대 환영… 은행권에선 대출 여력 감소 등 우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스테이블코인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법정 화폐와 연동하는 방식으로 변동성을 낮춰 결제, 송금, 정산 등에 쓰이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국내에서도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N서울타워 전망대에는 독특한 현금자동인출기(ATM)가 있다. 소비자들은 이 기기로 달러, 엔화, 위안화뿐만 아니라 비트코인, 이더리움, 테더 같은 가상자산을 실시간 시세에 맞춰 원화로 환전할 수 있다. 외국환관리법의 적용을 받아 하루 최대 2000달러까지 환전 가능하며 이용자는 여권을 지닌 외국인으로 제한된다. 29일 이 ATM 앞에서 만난 영국인 관광객 케이트 밀러 씨(44)는 “가상자산 거래소 바이낸스에 넣어둔 테더 500달러어치를 원화로 바꿨다”며 “한국에 온 지 이틀 됐는데, 카드 대신 현금을 받는 전통시장이 많아 원화가 필요하게 됐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이 ATM을 만든 다윈KS의 이종명 대표는 “이미 전 세계 69개국에 약 3만8000대의 가상자산 ATM이 설치돼 있다”며 “국내에서는 서울, 부산 등에서 7대가 운영되고 있으며, 테더의 사용 비중이 90% 정도로 높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 변동성 크게 낮춘 가상자산
스테이블코인은 ‘stable’(안정된)과 ‘coin’(코인)의 합성어로 안정성을 추구하는 가상자산을 통칭한다. 주로 달러, 유로, 엔화 등 법정 화폐에 코인의 가치를 일대일로 연동(페깅)하는 방식이 쓰인다. 법정 화폐와의 페깅을 통해 기존 가상자산들이 지닌 변동성을 최소화한 것이 핵심이다. 예를 들어,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 10개 중 8개 이상을 차지하는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가상자산 1개가 1달러의 가치를 갖도록 설계된다. 그 대신 이 코인을 발행하는 주체는 미 달러나 국채 실물을 준비금으로 확보해둬야 한다.
● 일상에 스며든 스테이블코인
평범한 소비자들이 기축 통화인 미 달러 대신 스테이블코인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점은 수수료 없이 몇 분 만에 국경을 넘나드는 결제, 송금 등을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은행 거래보다 송금 시간은 더 짧고, 수수료 비용 부담도 적은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는 얘기다. 이렇다 보니 기업들의 수출입 대금, 콘텐츠 계약금 등의 외화 정산 과정에서 은행 대신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한 거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스트라이프, 비자, 페이팔 등 글로벌 핀테크들은 스테이블코인을 단순 보유 목적이 아닌 ‘지급 결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페이팔의 경우 자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해 결제 시스템에 통합하기도 했다. JP모건, 뱅크오브아메리카, 씨티그룹 등 IB들은 가상자산 생태계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스테이블코인의 공동 발행을 검토하고 있다. 앞서 브라이언 모이니핸 뱅크오브아메리카 최고경영자(CEO)는 “스테이블코인이 법제화되면 우리도 진출할 것”이라며 일찌감치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국가 차원에서의 쓰임도 활발해지는 분위기다. 특히 자국 통화의 가치가 불안정한 튀르키예, 아르헨티나 등이 스테이블코인을 가치 저장 용도로 활용하고 있다. 일부 기업 사이에서는 급여를 스테이블코인으로 지급하는 문화도 생겼다. 특히 블록체인 및 가상자산 업계 종사자나 프리랜서처럼 국경을 넘나드는 고용 형태를 지닌 이들 중에서 스테이블코인으로 월급을 받는 사례가 많다. 한 블록체인 스타트업의 사업담당 안모 씨(31)는 “본사가 싱가포르에 있는데 송금 수수료 및 시간 소요 등을 고려해 (본사에서) 스테이블코인을 급여로 주고 있다”며 “이와 연동된 카드도 있어 스테이블코인으로 급여를 받아도 전혀 불편한 게 없다”고 했다.
스테이블코인은 은행권에 비해 소비자에게 높은 금리를 지급하기도 한다. 현재 바이낸스에 테더를 예치하면 최대 연 8.12%의 이자를 받을 수 있다. 크라켄, 코인베이스 등에서도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예치하면 연 4∼5%대의 금리를 얹어준다. 가상자산 거래소에 넣어두는 것만으로 시중은행보다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가상자산 거래소가 파산할 경우에는 원금을 되돌려 받을 수 없다는 점은 기억해야 한다.
● 미, 스테이블코인 통해 달러 패권 유지 노려
미 국무부에 따르면 올 3월 말 기준 테더와 서클은 미 국채를 1283억 달러(약 177조 원)어치 보유해 한국(1258억 달러)의 보유량을 처음으로 추월했다. 적어도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테더와 서클이 한국, 독일, 아랍에미리트(UAE)보다 더 중요한 ‘채권 고객’으로 자리 잡았다는 얘기다. 미 국채의 전통적인 수요자였던 각국 중앙은행들이 예전만큼 국채를 매수하지 않는 상황도, 미 정부가 테더와 서클을 예의주시하는 배경이다.
특히 데이터 분석업체 CEIC에 따르면 중국의 미 국채 보유액은 2013년 11월 1조3167억 달러에서 올 1월 기준 7610억 달러로 약 42% 줄었든 상황이라 미 정부 입장에서는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성장하길 내심 바랄 수밖에 없다. 중국을 비롯한 각국 중앙은행들이 미 국채 보유 물량을 줄이는 상황에서, 미 국채를 준비금으로 보유해야 하는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국채 수요를 유지할 수 있어서다.
이 가운데 미 상원은 20일(현지 시간) 스테이블코인 시장을 법제화하기 위한 ‘지니어스 법안’을 통과시킨 상황이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 역시 지난해 미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에 출석해 “스테이블코인을 화폐의 한 형태로 보고 있으며, 이에 대한 연방정부의 강력한 역할이 필요하다”고 언급하며 힘을 실어준 바 있다.
● 일각에선 신뢰성 우려도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의 광범위한 확산에 따른 위험 요인도 만만치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례로 테더는 현재까지 공표된 재무 상태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지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법인이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설립돼 있어 감사보고서 제출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가상자산 거래소 FTX의 파산도 자금 유동성에 문제가 있다는 의혹에서 출발한 바 있어, 테더가 신뢰도를 높이려면 회계법인의 외부 감사를 받아야 한다는 지적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은행권에서 예금이 이탈하고 이에 따라 대출 여력이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마크 J 플래너리 플로리다대 교수는 논문을 통해 “은행의 신용중개 기능이 약화될 수 있으며, 특히 대응 능력이 부족한 소형 은행을 중심으로 취약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 바 있다.
스테이블코인으로 인해 대량의 미 국채가 담보로 묶여 있는 상황 자체가 리스크라는 지적도 있다. 한 채권 매니저는 “스테이블코인의 담보를 재사용하는 것이 금지돼 있지만 대량의 미 국채가 담보로 제공된 상황 자체가 국채 시장의 유동성을 심각하게 저해할 위험도 있다”고 지적했다.
스테이블코인 |
스테이블코인이란 금, 법정화폐 등 특정 자산과 일대일로 연동돼 가치가 고정되는 가상자산이다. 보통의 가상자산 대비 변동성이 낮아 결제, 거래 등에 활용되고 있다. |
강우석 기자 ws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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