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혜영이 연극 '헤다 가블러'에 대한 애정을 오롯이 드러냈다.
이혜영은 19일 서울 중구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진행된 연극 '헤다 가블러' 기자간담회에서 13년 만에 같은 역할로 무대에 오르는 것에 대해 "이전에 못 한 걸 하려고 시작하게 됐는데, 박정희 연출이 '헤쳐, 모여'라고 아예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 내셨다"고 말하며 웃었다.
같은 시기에 후배 이영애가 LG아트센터에서 동명의 작품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비교되는 것에 대해 "배우도, 연출진도 다르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라면서 보고 판단해 달라고 당부했다. 개막 전날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하차한 윤상화에 대해 언급할 땐 울컥한 듯 눈물까지 보였다.
'헤다 가블러'는 '근대 연극의 아버지' 헨리크 입센이 1980년에 발표한 희곡이다. 남편의 성인 테스만을 거부하고, 아버지의 성이자 정체성을 담은 가블러를 붙인 채 살아가는 여주인공 헤다를 앞세워, 남성의 부속품이 아닌 독립적인 여성의 주체성을 천명해 17세기 남성 중심적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혜영은 2012년 '헤다 가블러' 초연 당시 작품의 주인공을 맡아 전회차, 전석 매진 신화를 일궜고, 제5회 대한민국연극대상 여자 연기상, 제49회 동아연극상 여자 연기상을 수상했다. 이혜영은 "17세기에서도 헤다는 '괴물'이라고 불렸는데, 지금도 그렇게 느껴진다는 게 입센이라는 인물이 엄청난 거 같다"며 "그런데 여성 관객들은 이해하는데, 남성 관객들은 그러지 못한다는 게 저희가 그 간극을 더 넓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면서 웃음을 보였다.
배우의 복잡한 심리 묘사가 관건으로 불리는 특성상 어떤 배우가 헤다 역을 맡느냐에 따라 작품의 성패가 결정된다고 평가될 정도로 헤다 역은 어렵고 까다롭기로 소문났다. 박정희 연출은 2012년 초연 당시 "헤다를 할 배우는 이혜영밖에 없다"는 판단으로 그를 한국의 첫 헤다로 발탁했고, 이혜영은 사회적 규범 속에 한 인간이 느끼는 권태와 공허, 정신적 고립감을 감도 높이 연기해 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혜영은 헤다에 대해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저를 현대극장으로 오디션 보러 갔을 때 처음 뽑아주신 그때 김의경 선생님이 ''헤다 가블러'를 하자'고 하는데 저는 그때까지 이런 작품이 있는지 몰랐다"며 "이렇게 세련되고, 충격적인 극이 있을까 싶더라. '왜 여태까지 안했을까'라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는데, '이혜영 같은 배우가 없었기 때문이지'라고 하셨다"고 자평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면서 "이 극을 하면서 이전에 못 한 걸 하려고 했다"며 "헤다의 몰입에 방해되는 것들은 전혀 안 하고, 사람들도 안 만나고 있다"면서 열정을 드러냈다.
또 "연극이 좋은 이유는 일회성 때문"이라며 "연극의 완성은 관객들인데, 관객들이 올 때마다 지겹도록 연습한 걸 토대로 다 함께 단 한 번의 완성을 매일 새롭게 하는 거다. 그 순수함과 노련함이 무대에 함께 있어야 하고, 그게 매력이고, 그래서 제가 무대를 좋아한다"고 애정을 표했다.
헤다는 결혼한 지 6개월이 된 새 신부라는 설정이다. 환갑이 넘은 이혜영은 나이를 초월한 열연을 선보인다. 이혜영은 "카메라에 담기는 제 모습은 있는 그대로인데, 관객들과 '헤다 가블러'를 같이 만들어 갈 때 제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어 "'마이 페어 레이디'가 오드리 햅번이 해서 유명해졌지만, 그 희극 대본에는 10대가 하는 거라고 적혀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박정희 연출도 "무대라는 게 배우들의 나이는 숨긴다"며 "무대를 본다면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3년 만에 돌아온 '헤다 가블러'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헤다'들에게 바치는 찬사로 기획됐다. 19세기 말 계급주의가 무너져가는 숨 막히는 부르주아 사회 속에서 존재의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과 그 자유의지를 추락으로 파괴적 결말을 맞는 헤다를 더욱 깊게 들여다봤다. 여기에 주변 인물들의 조명, 각 인물 간의 감정의 밀도를 더하는 방식으로 사회 규범을 내면화 당한 연약한 개인이 본능적으로 갈망하는 자아 실존 의지를 현대 사회에 제기할 예정이다.
박정희는 "초연 땐 헤다의 해석은 신이 되려고 했다는 여자로 잡아서 그때 더 카리스마가 넘친다"며 "이번엔, 우리가 남성과 여성을 넘어서 본질적으로 하나의 인간 아니냐. 그 부분에 집중했다"고 차별점을 소개했다.
이혜영은 "모든 건 다 연출진이 알아서 할 거고, 저는 체력과 함께하는 배우들이 저를 '헤다'라고 믿게 하는 게 이번 목표였다"며 "연습부터 공연이라 생각하고, 긴장을 갖고 노력했다"고 13년 만에 다시 헤다로 임하는 각오를 전했다.
최근 영화 '파과' 홍보 프로모션과 함께 연극 연습에 임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링거도 맞고, 노래 레슨도 받고 열심히 하고 있다"며 "그러니 제가 잘하고 있는지 보러 와달라"고 거듭 강조했다.
박정희 연출은 이혜영에 대해 "연출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배우가 몇몇 있는데, 그게 이혜영 배우"라며 "스스로 독창적으로 풀어내는 장면들이 있다. 그걸 보며 제가 감탄했다"고 전했다. 이어 "독보적인 배우고, '넘사벽' 배우인데, 이번에도 지성으로도 성숙했고, 이전에도 깊었지만, 더 깊게 연출진의 상상을 뛰어넘더라"고 극찬을 이어갔다.
특히 헤다의 최후에 대해 "이혜영 배우와 함께 만들었다"며 "총구를 관객에게 겨누고, 다른 배우들에게 겨누는 그런 모습에서 디오니소스를 경험한 헤다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삶을 썩은 만찬으로부터 파괴하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거라고 봤다"고 설명했다.
디오니소스에 대해 "술의 신으로 알려졌지만, 창조와 파괴의 신이기도 하다"며 "새로운 시작을 위해 파괴해야 한다는 건데, 신화적으로 얘기하면 멀리 느껴지지만 파괴를 통한 창조는 일상에도 일어나는 일이라 '디오니소스적'이라 본다. 헤다 역시 삶과 맞닿아 있어서, 새로운 삶을 위해 기존의 삶을 파괴하는 거다"고 설명했다.
상연을 앞두고 공교롭게도 불거진 출연 배우의 부상으로 상연이 미뤄졌다. "딱 일주일 연습해서 무대에 올라야 하는 거라 부담감을 갖고 시작했는데, 대사를 이틀 만에 다 외우고, 그제야 식사했다고 하더라"며 "성격이 자유로운 캐릭터다 보니 동선도 스스로 바꾸더라. 처음부터 브라크 같았다. 배우들의 잠재력과 집중력을 또 깨닫게 됐다"고 했다.
이혜영은 "의기양양하게 시작했는데, 공연 전날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절망했다"며 "윤상화 배우는 특별히 아름다운 배우였다"고 눈물을 보였다.
이혜영은 당시 상황에 대해 "전의를 상실한 패전 배우처럼, 너무 힘들었다"며 "이렇게 공연을 하는 게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새로운 배우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절망했고, 그럼에도 관객들과 약속을 지켜야 하기에 정말 그 일주일이 너무 힘들었다"고 덧붙였다.
홍선우에 대해 "드라마, 영화 연극은 그렇게 바로 대본만 외워서 바로 하는 게 가능한데, 연극은 그게 힘들다"며 "연습한 만큼 나오는 거라 지금도 가장 먼저 나와서 연습하고, 끝날 때까지 고생할 거다. 우린 서로서로 영감을 받고, 서로가 창조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임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헤다 가블러'는 지난 8일 상연을 시작해 오는 1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선보여진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