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의 크립토네이션]법인시장 개방, EU 미카법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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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첫 디지털자산 통합규제법 시행 후 기업 90% 퇴출
규제 경쟁선 승리했지만, 유동성 줄고 기업 생태계 위축
한국도 기본법 입법 지연 속 금융당국 법인시장 개방 뒷전
법인·기관 부재에 리스크는 개인 몫…시장도 사업자도 정체

  • 등록 2026-07-21 오후 3:29:18

    수정 2026-07-21 오후 3:29:18

[이데일리 이정훈 디지털자산센터장] 유럽연합(EU)이 디지털자산시장을 통합 규율하기 위해 지난 2023년 마련한 암호자산시장규제법, 이른바 미카(MiCA)가 긴 유예기간을 끝내고 이달부터 공식 시행됐습니다.

[이정훈의 크립토네이션]법인시장 개방, EU 미카법의 교훈

이를 통해 EU는 디지털자산 기업들의 규제 준수와 투자자 보호를 한층 높일 수 있는 규제 프레임워크를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확립하게 됐습니다. EU 당국 입장에서는 자랑스러운 타이틀이 됐을 겁니다. 그러나 글로벌 규제 경쟁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디지털자산 산업에서 승리했다곤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실제 이 과정에서 EU 전역에서 활동하던 2747개에 이르는 디지털자산 관련 기업들 중 단 280곳 정도만 라이선스를 받아 계속 활동하게 됐습니다. 90%의 디지털자산 기업들은 EU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거나 문을 닫았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가상자산 거래소인 바이낸스, 세계 최대 스테이블코인인 테더의 USDT도 라이선스를 따지 못해 유럽 사업을 접었습니다.

이로 인해 EU 디지털자산시장 내 유동성은 크게 줄었고, 사업하는 기업이나 투자하는 개인들이 이전보다 어려움에 처할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또한 거래소나 스테이블코인을 갈아타지 않는 투자자라면 EU 규제에 닿지 않는 해외로 자산을 옮길 것이고, 이는 결국 투자자 보호 관점에서 법 시행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이 됩니다.

금융위의 법인시장 개방 로드맵 (자료= 금융위)
금융위의 법인시장 개방 로드맵 (자료= 금융위)

개인적으로 디지털자산 기업들을 옹호하려는 건 아니며, 이들 기업이 규제당국의 눈높이에 부합하지 못했다면 라이선스를 주느냐 여부는 당국이 판단할 문제입니다. 다만 디지털자산이라는 게 국경의 경계 없이 넘나드는 자산이다보니, 어느 한 지역에서의 규제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들로선 상대적으로 디지털자산 기업들에 친화적인 틀을 짜고 입법을 한창 진행 중인 미국과 영국 등과의 규제 차익을 노리는 게 당연하니 말입니다.

유럽 내 디지털자산 기업인 트리플A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에릭 바르비에는 최근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비트코인과 USDC로는 결제할 수 있는데 USDT로는 결제할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미카법이 시행됐지만, EU 이용자들의 규제 리스크나 자금세탁 위험은 사실상 동일하다. 이런 규제 방식은 의미가 없다. 새로운 활용 사례를 만들거나 경쟁을 촉진하고, 기업들이 적합한 사업 환경을 찾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금융위의 법인시장 개방 로드맵 (자료= 금융위)
금융위의 법인시장 개방 로드맵 (자료= 금융위)

디지털자산의 미래를 얘기할 때 규제가 전부가 될 순 없습니다. 규제의 명확성은 기본이고, 실제 특정 지역의 디지털자산 산업과 시장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누가 더 많은 창업자와 개발자, 투자자를 유치할 수 있느냐를 얘기해야 합니다. 규제를 준수하면서도 디지털자산을 대규모로 유통할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는 실질적인 성장 경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규제는 종착점이 아니며, 새로운 산업 태동의 출발점입니다.

국내에서도 디지털자산기본법 입법이 지연되고 있는 가운데 일반기업과 금융회사, 기관투자가들의 시장 참여 제한을 풀어 달라는 요구가 디지털자산업계를 중심으로 커지고 있습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 게, 금융위원회는 이미 지난해 2월 법인 시장참여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비영리법인 등의 매도부터 허용한 뒤 상장사와 전문투자자 등록법인들의 투자·재무 목적 매매를 시범 허용하기로 했었습니다. 금융회사와 일반법인에 대한 전면 허용도 디지털자산기본법 입법 이후 검토하기로 했구요.

그러나 약속한 시점이 됐는데도 비영리법인 매도 허용 이후 추가적인 규제 완화가 좀처럼 이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국내 디지털자산시장은 거래대금 감소에 시달리고 있고, 거래소와 커스터디(수탁), 월렛(지갑) 등 각 사업자들은 고객 수요 부족과 그에 따른 성장 정체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디지털자산시장의 경쟁력은 규제의 엄격함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유동성을 얼마나 끌어들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제도권 자본을 이 시장 안으로 적극 불러 들이고 있고, 유럽도 미국에 비해선 보수적이지만 그나마 규제된 사업자의 시장 참여를 허용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시장 내에 유동성을 늘려줄 수 있는 주체인 일반법인과 기관투자가를 시장 바깥에 세워두고 있는 양상입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자산 거래가 활발한 국가지만, 거래는 개인투자자에게 과도하게 편중돼 있습니다. 반면 시장에 유동성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전문적인 위험 관리를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기업과 기관투자가는 원화 거래소에 진입하지 못하고, 금융회사는 자기자본으로 디지털자산을 보유하거나 투자하지 못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전문적인 투자자들을 배제한다면 시장 위험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 위험이 개인투자자에게 집중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최근 디지털자산업계와의 간담회에서 법인시장 개방의 필요성에 공감을 표시하면서도 “우리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며 금융위에 공을 떠넘겼고, 금융위는 당초 올 1분기 내에 영리법인 디지털자산시장 개방 가이드라인을 공개하겠다던 방침을 미루면서도 별다른 해명조차 없는 상황입니다.

그나마 권대영 금융위 부위원장은 최근 한 포럼 행사에서 “금융사와 법인의 디지털시장 직간접 참여 논의에 대한 불확실성을 줄이고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며 민간협의체를 통해 현장 목소리를 수렴한 뒤 제도화에 나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참에 이번 EU의 미카법 시행을 반면교사로 삼아 시장 유동성을 확충하고 많은 기업들이 활발하게 참여할 수 있는 시장 개방에 속도를 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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