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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직 지원자가 회사 인사담당자로부터 구두 합격 통보를 받고 구체적인 연봉·직급을 협상하는 단계에 있었더라도 정식 근로계약 체결될 것으로 '신뢰'해서는 안된다는 판결이 나왔다. 특히 회사가 제안한 조건에 응하겠다고 한 이후에 회사가 지속해서 연봉을 낮췄어도 근로계약 체결을 거부한 것으로 볼 수 없으므로 불법행위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도 봤다.
전문가들은 "이직 시 인사담당자의 말만 신뢰하고 섣불리 사직서를 제출했다가는 큰 피해를 입을수 있다"며 "회사 인사담당자들도 인력 채용 시 협상 권한을 확보하고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합격통보까지 하고…연봉 800만원 깎자는 회사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동부지방법원 2-2민사부는 최근 근로자 A씨가 B사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이같이 판단하고 회사 측의 손을 들어줬다.
A씨는 헤드헌팅 업체를 통해 B사의 2021년 6월 대졸 경력사원 채용 공고를 안내받고 입사지원서를 제출했다. 이력서에는 "현재 연봉 4500만원, 희망 연봉 5500만 원, 희망 직급 과장 2년차"라고 적었다. 6월 말 면접을 본 A씨는 인사담당부장 C로부터 구두로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이틀 뒤 C부장은 이메일로 연봉계약서, 급여명세서, 원천징수 영수증 등 채용 관련 서류를 요청했고 A씨는 관련 서류를 보냈다.
그런데 회사 측은 연봉 5500만원에 과장 1호봉으로 다소 하향된 근로조건(1차 조건)을 불렀다. 그리고 8월 2일부터 출근 가능한지도 함께 물었다. A는 "가능하다"고 답하고 사실상 회사와 연봉 협상이 마무리 단계라고 여겨, 사흘 뒤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후 이틀 연속 자격증 사본과 건강 검진 결과를 보내면서 채용이 마무리 되는 듯했다.
그런데 회사의 변덕이 시작됐다. C는 열흘 뒤인 7월 12일 또다시 연봉을 5000만원으로 낮춘 조건을 제안했다. A는 황당했지만 "5200만원이면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같은날 C는 되레 "4900만원에 대비 말 호봉, 2년 후 과장 진급을 조건으로 재가받았다"며 제시 조건을 더 낮췄다. A씨가 주저하자 회사 측은 아예 3일 뒤에는 아예 헤드헌터에게 문자를 보내 '기본 연봉 4700만원, 대리 5년 차'를 제시했다.
화가 난 A씨는 법적 책임을 묻기로 결정하고 법무대리인을 통해 "5500만원 과장 1호봉 조건(1차 조건)으로 이미 근로조건이 성립됐는데 회사의 귀책으로 파기됐다"며 "재취업 지연으로 인한 일실이익과 구직비용 등을 이유로 손해배상 3000만원을 달라"는 내용 증명을 보냈다.
이에 회사는 일주일 뒤 부랴부랴 "최종 합격 통보"라며 연봉 4900만원과 대리 4년 차를 제시하고 8월 2일까지 출근하라고 했지만, A씨는 출근하지 않았다. 결국 A는 약 7개월이 지난 이듬해 3월 다른 회사에 취직했다.
비록 타사 취업에 성공했지만 A씨는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A는 "회사 측은 최종합격을 통보하고, 다음날 (1차 조건으로) 연봉 등 근로조건 합의에 이른 후 후속절차를 준비하도록 하고 출근일까지 정했다"며 "하지만 회사는 합의를 번복해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기존 직장에 사직서를 내게 만드는 손해를 입히는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재취업 시까지 실직 상태로 돈을 벌지 못한 손해 2500만원과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 1000만원도 청구했다.
○합격통보 받았어도 채용 확정 아냐
하지만 법원은 "A에 1차 조건에 따라 근로계약이 체결되리라는 정당한 기대나 신뢰를 부여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모집 공고에는 서류전형, 인성검사, 1·2차 면접, 건강검진, 최종합격자 발표의 전형 방법이 포함돼 있지만, 직위나 급여에 관한 내용은 전혀 포함돼 있지 않다"며 "1차 조건으로 합의했다고 보기엔 1차 조건 제시 당시는 예정된 전형 절차에서 건강검진 절차 전이었고, A가 그날 이후에도 자격증 등 서류를 회사에게 송부했다"고 지적했다. 이를 바탕으로 "절차상 A는 최종합격자가 되기 전임을 알 수 있었는데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A의 과실을 지적했다.
A가 회사의 협상 제안에 역제시를 한 것도 불리한 정황이 됐다. 재판부는 "1차 조건이 확정적이 아니라는 것을 A가 인식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회사가 연봉을 낮춘 것도 이유가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회사가 원천징수를 확인한 결과 A의 기본연봉은 이력서에 쓴 4500만원이 아닌 4300만원"이라며 "회사는 이를 기준으로 회사 사원들의 연봉과 직급을 비교해서 협상을 하려고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회사는 "1차 조건과 다른 연봉과 직급으로 근로계약을 체결하려 하였다거나 1차 조건과 다른 조건으로 채용 최종 합격 통보를 한 것을 두고 상당한 이유 없이 근로 계약의 체결을 거부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하고 A의 청구를 기각했다.
정상태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구두상의 합격 통보를 받거나, 협상 마무리 단계에 준하는 근로조건 논의가 있었더라도 정식 근로계약에 대한 기대나 신뢰를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 주는 사례"라며 "기업의 내부 채용 승인 절차가 남아 있고, 최종 서면 계약이 없을 경우에는 구직자가 끝까지 채용 확정을 과신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