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호찌민시 사이공하이테크파크에 있는 인텔 공장은 현지 반도체 산업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다. 이곳은 웨이퍼를 깎아 칩을 만드는 전공정 공장이 아니다. 완성된 반도체를 조립하고 패키징한 뒤 성능을 검사하는 후공정 거점이다. 그런데도 무게감이 상당하다. 인텔이 이 공장에 투입한 누적 설비·시설 투자액은 15억달러에 이른다. 베트남 공장은 인텔의 전 세계 패키징·테스트 물량의 50% 이상을 담당한다. 지난해 4월 기준 누적 생산량은 40억개를 넘어섰고 2010년 이후 지난해 1분기까지 누적 수출액은 962억달러를 웃돌았다.
베트남 반도체 매출, 2030년 466억달러 전망
현재의 베트남 반도체 산업은 '후공정·설계 허브'로 설명된다. 4일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베트남 반도체 매출 규모는 올해 291억3000만달러에서 2030년 465억5000만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베트남 안에서 발생하는 반도체 관련 제품·서비스 시장 전체 매출액 추정치다. 연평균 성장률은 12.43%다. 품목별로는 집적회로(IC)가 80%대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정부 목표도 공격적이다. 베트남은 2030년까지 반도체 산업 매출 250억달러, 설계기업 100개, 후공정 공장 10개, 생산공장 1개, 반도체 인력 5만명 이상을 목표로 잡았다. 스태티스타 전망치와 정부 목표치가 다른 이유는 집계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스태티스타는 시장 전체 매출을, 베트남 정부는 국가 전략상 육성 목표를 내건 것이다.
기초체력은 이미 쌓이고 있다. 인텔, 앰코테크놀로지, 하나마이크론 등 글로벌 후공정 기업들이 베트남을 주요 생산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마벨, 르네사스, 마이크로칩, 시놉시스 등은 설계·검증·전자설계자동화(EDA) 영역에서 베트남 내 인력과 연구 거점을 확대하는 중이다. 베트남은 값싼 노동력만 앞세우던 생산기지에서 설계, 검증, 테스트, 패키징을 아우르는 공급망 거점으로 올라서는 단계에 들어섰다.
현지 기업들, 후공정·테스트 거점 확대 '총력'
현지 기업들도 속도를 내고 있다. FPT세미컨덕터는 전력관리반도체(PMIC), 사물인터넷(IoT) 칩, 아날로그·디지털 IC 등을 설계하고 외주 생산·후공정 연계를 통해 사업을 넓히고 있다. 박닌성엔 반도체 테스트 공장을 추진 중이다. 1단계 공장 면적은 1600㎡다. 2026~2027년 자동검사장비(ATE) 테스터, 핸들러 6개 라인, 신뢰성 시험구역을 먼저 구축한 뒤 2028~2030년 테스트 라인 18개를 추가한다. 전체 면적은 6000㎡로 확대할 계획이다. 설계 이후 단계인 시험·검증 역량을 확보하려는 시도다.
비엣텔하이테크는 하노이 호아락하이테크파크에 27헥타르(㏊) 규모 반도체 복합단지를 조성해 내년 말까지 투자·건설을 마무리하고 기술이전과 시험생산을 시작하겠다는 계획이다. 설계·제조·시험 기능을 묶은 산업단지 규모다. 비엣텔은 5G 통신장비, 국방전자 기술을 기반으로 초기 팹리스 모델에서 생산을 포함한 전주기 사업 구조로 확장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다. 다만 구체적인 공정 수준, 양산 물량, 고객사 등이 아직 확인된 단계는 아니다. 전공정 역량은 여전히 초기 단계로 보는 것이 맞다는 것이 중론이다.
베트남의 경쟁력은 빠르게 확장되는 후공정·설계 기반에 있다. 현재 베트남 반도체 생태계는 약 60개 칩 설계사, 8개 패키징·테스트 업체, 20여개 소재·장비 공급사로 구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전체 반도체 인력은 약 1만5000명이다. 이 가운데 IC 설계 인력이 약 7000명, 패키징·테스트·소재·장비 인력이 7000~8000명으로 추산된다. 기반은 만들어지고 있지만 글로벌 수준의 시니어 엔지니어는 부족하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베트남이 주목받는 이유는 정책 방향이 명확해서다. 베트남은 반도체, AI, 5G·6G, 클라우드, 양자기술 등을 국가 전략기술로 묶어 관련 연구개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반도체·AI 연구개발센터엔 초기 투자비의 최대 50%를 지원할 수 있다. 전략기술기업·1급 첨단기술기업엔 25년간 법인세 10% 적용, 원자재·부품 5년 수입관세 면제 등 인센티브도 부여한다. 반도체 기업 입장에선 후공정 증설과 설계 연구거점을 함께 검토할 만한 유인이 생기는 셈이다.
전문가들 "베트남 등과 협력 확대는 필수적"
한국 기업엔 기회일 수 있다. 베트남이 단기간에 한국·대만 수준의 첨단 전공정 경쟁력을 갖추기는 어렵다는 목소리가 높다. 대신 후공정 소재·장비, 테스트 솔루션, 패키지 기판, 전력반도체, 설계 검증, 반도체 인력 교육에선 협력 수요가 커질 가능성이 크다. 이미 하나마이크론은 베트남을 삼성전자·SK하이닉스향 패키징 생산기지로 활용하면서 비메모리 분야로 사업 확장을 추진하고 있다.
한·베트남 반도체 협력도 확대되고 있다. 양국 기업들은 지난 4월 한·베트남 정상회담을 계기로 기술·에너지·인프라 분야에서 다수의 협약을 맺었다. 반도체 분야에선 한국반도체설계산업협회와 FPT가 차세대 반도체 기술 개발 협력에 합의했다. 베트남이 설계·검증 역량을 키우려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기관의 협력 여지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 기업 입장에선 또 다른 후공정 거점을 확대할 수 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학과 교수는 "베트남은 특히 조립 공정에 있어서 한국 기업과 많이 협력해왔어서 기술적 협력 부분에서 맞는다"며 "잠재적 성장이 가능한 나라이기 때문에 협력을 확대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베트남을 한국 반도체 산업의 '대체지'로 보는 것은 무리다. 베트남의 역할은 첨단 전공정 경쟁보다 후공정, 테스트, 설계 검증, 인력 양성, 공급망 다변화 쪽에 무게가 실린다. 한국 기업들은 국내 첨단 생산거점과 베트남 후공정 거점을 함께 활용하는 방식으로 공급망을 넓힐 수 있다.
베트남 반도체 산업 전망은 '전공정 강국'보다 '공급망 보완재'에 가깝다. 인텔·앰코·하나마이크론이 이끄는 후공정 기반 위에 FPT·비엣텔 같은 현지 기업이 설계·테스트·제조 역량을 덧붙이는 단계다.
신현철 광운대 반도체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공급망이 있고 미국·일본·대만·한국이 모여있는데 아시아권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면 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 국가들과의 협력을 확대해 산업계와 학계의 여려 교류가 필요하다"며 "베트남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도 있고 설계 분야 인력이 좋을 뿐 아니라 인건비가 싸기 때문에 협력 확대는 필수적"이라고 했다.
김대영/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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