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현재 한국 경제가 1990년대 말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했다. 당시와 달리 한국 경제의 성장 엔진이 꺼지고 있다는 점에서다. 박 전 총재는 4일 인터뷰에서 “그런 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제시한 ‘잠재성장률 3% 공약’은 대환영”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를 위해 “정부, 기업, 노동계가 함께 ‘경제 비상시국’을 선언하고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박 전 총재는 “진보 정권은 우클릭해야 성공한다”며 “김대중 정부가 ‘노사정 대타협’을 이룬 것처럼 이재명 정부도 과감한 노동개혁에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한국경제신문은 국내 경제 원로 및 석학이 새 정부에 당부하는 말을 들어보는 릴레이 인터뷰를 싣는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소 이야기한 ‘상인적 현실감각, 서생적 문제의식’이라는 말을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이상을 잃지 않되 실용주의를 추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평소 약속한 것처럼 이념보다 실용주의를 우선시해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중도 보수의 방향성을 바탕으로 실용적 정책을 추진해줬으면 합니다.”
▷현재 한국 경제를 어떻게 진단합니까.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에 준하는 위기 상황입니다. 그때보다 더 큰 위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고비만 넘기면 성장이 지속됐습니다. 지금은 갈수록 성장의 불이 꺼지는 상황입니다. 장기적·구조적 불황으로 가고 있습니다. 한국 잠재성장률은 20~30년 뒤에는 마이너스로 갈 겁니다. 대대적 구조개혁을 추진하지 않으면 막지 못합니다. 정부, 기업, 노동계, 정당이 다 함께 경제 비상시국을 선언해야 합니다. 위기 극복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내용의 선언이 필요합니다.”
▷이재명 정부의 경제 공약은 어떻게 평가하나요.
“이 대통령이 잠재성장률을 3%로 올린다고 했는데 대환영입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뼈를 깎는 구조개혁과 구조조정이 절실합니다. 노동개혁, 규제개혁, 교육개혁, 연금개혁, 의료개혁 등에 나서야 합니다. 소득 대비 과도하게 비싼 집값을 낮추는 것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떤 구조개혁을 해야 할까요.
“성장과 투자를 가로막는 규제를 우선 개혁해야 합니다. 노동개혁도 함께 추진해야 합니다. 이재명 정부는 강력한 추진력을 갖췄습니다. 행정부와 입법부를 단일 세력이 주도하는 지금이 구조개혁을 위한 절호의 기회입니다. 일당 독재라는 비판도 있지만 집권 기간이 5년뿐입니다. 5년 집권하는 정부를 독재라고 할 수 있나요.”
▷새 정부가 노동개혁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보수 정권은 좌클릭해야 성공합니다. 반대로 진보 정권은 우클릭해야 성공하죠. 진보 정권인 이재명 정부는 노동개혁이 다른 정권보다 상대적으로 쉬울 겁니다. 지지층인 근로자와 노동조합을 설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노동당 출신으로 우리가 볼 때는 극좌파입니다. 하지만 그는 노동조합의 특권을 없애는 노동개혁에 성공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노사정 합의로 근로자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것은 김대중 정부 때가 유일했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노사정 대타협을 이룬 것처럼 이재명 정부도 노동개혁에 나섰으면 합니다. 노동의 유연성을 높이고, 임금체계를 직무·성과급제로 바꿔야 합니다. 대신 근로자에게 강력한 복지를 제공해야 합니다.”
▷이재명 정부의 재정 확대 정책에 대한 평가를 부탁합니다.
“당분간 큰 정부 체제로 가야 합니다. 정부의 역할이 막중합니다. 부진한 경기를 북돋기 위해 재정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 우리나라 국가채무는 국내총생산(GDP)의 50%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적자 재정을 당분간 감수하고 추가경정예산안을 짜야 합니다. 다만 재정건전성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저출생·고령화에 따른 인구 문제도 심각합니다.
“인구 문제를 풀려면 근본적으로 집값을 안정화해야 합니다. 집값이 높기 때문에 결혼을 못 하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겁니다. 한국 경제가 퇴화하는 최대 요인 가운데 하나가 집값입니다. 집값 수준을 따지는 지표 가운데 하나로 ‘가구소득 대비 주택가격 비율(PIR)’이 있습니다. 한국의 PIR이 선진국보다 두 배 높습니다. 선진국 수준만큼 낮춰야 합니다. 앞으로 5~10년 동안 들어서는 정부는 매년 집값 상승률을 0%대로 낮추는 동시에 성장률은 3%대로 올려야 합니다.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국토교통부 기준으로 서울의 PIR(2023년)은 13이다. 13년 동안 소득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서울에서 집 한 채를 살 수 있다는 의미다. 박 전 총재의 말은 이 같은 PIR을 6~7로 낮추자는 의미다.
▷건설부(현 국토교통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정책을 짜본 입장에서 집값을 어떻게 안정화하면 좋을까요.
“집값 안정을 위해 공급·수요 양쪽을 모두 관리하는 정책을 설계해야 합니다. 공급 쪽에서는 그린벨트를 풀어서라도 과도할 만큼 공급을 늘려야 합니다. 가수요를 막기 위해 부동산 보유세율도 높여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보유세가 싸기 때문에 주택이 주거 수단이 아니라 투기 수단으로 변질된 겁니다. 부동산 보유 과세를 높이는 것은 양극화 해소법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 김익환 기자
박승 前 총재 약력
△1936년 전북 김제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미국 뉴욕주립대 경제학 석·박사 △1961년 한국은행 입행 △1976~2001년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1986~1988년 한은 금융통화위원 △1988년 청와대 경제수석 △1988~1989년 건설부 장관 △1999~2000년 한국경제학회 회장 △2002~2006년 한국은행 총재 △2006년~현재 중앙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