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과 몽룡의 파드되가 차이콥스키를 만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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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에서 춘향과 몽룡이 남원 광한루에서 처음 만나 춤을 추는 장면.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1막에서 춘향과 몽룡이 남원 광한루에서 처음 만나 춤을 추는 장면.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수백 년 전 서양에서 탄생한 발레가 동양의 예술로 다시 태어났다. 지난 13일부터 15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이어진 유니버설발레단 정기공연 ‘춘향’에서다. 이번 공연에선 한복이 그려내는 발레의 움직임이 유별나게 아름다웠다. 발레리노들이 휘날리는 도포 자락과 발레리나들의 춤사위에 나부끼는 치맛자락은 춘향과 몽룡이 만나고 이별한 남원의 정취를 무용으로 전달했다. 무용수들은 부챗살에 발린 화선지에 피어나는 매화 가지처럼 신비롭게 동작을 뻗어나갔다.

“한국의 미(美)를 살렸다”는 창작 발레가 넘쳐나는 요즘, 제대로 된 한국적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느냔 질문을 받는다면 망설임 없이 유니버설발레단의 자랑인 ‘춘향’을 꼽겠다. 이 작품은 발레단이 2007년 창작 초연해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쳤다.

광한루에서 그네를 뛰던 춘향이의 모습은 진짜 그네를 타는 게 아니라 춤으로 표현됐다. 두 명의 남성 무용수가 춘향의 팔을 양쪽에서 잡고 들어 올리면 춘향이 발끝을 ‘포인트’로 유지하고 자전거 페달을 밟듯, 양다리를 부드럽게 움직였다. 춘향과 몽룡이 사랑을 확인한 직후 헤어지는 장면에서는 이별 2인무와 함께 먹구름을 동반한 태풍과 같은 여성 군무가 어우러진다. 애절한 이별을 대변하듯 쉴 틈 없이 휘몰아치는 비바람으로 형상화된 ‘회색 옷의 군무’는 남다른 속도감으로 서양의 고전 발레 군무와 구별됐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익숙할 <춘향전>이 줄거리였기 때문일까. 프로그램북이 필요 없는 관객의 손은 유독 가벼워 보였다. 해학적인 장면 덕에 발레 공연임에도 종종 객석의 웃음소리가 번졌다. 한국 전통의 이야기를 뼈대 삼은 데다 패션디자이너 이정우가 지은 한복 의상이 등장하는 건, ‘춘향’과 기존 고전 발레의 풍경과 가장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발레 ‘춘향’은 한국적 요소로만 작품을 덧칠하는 촌스러운 전략은 취하지 않았다.

우선 고전 발레의 장르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클래식 음악을 주제 음악으로 고집한 게 큰 힘을 발휘했다. 안무를 담당한 유병헌 예술감독은 ‘한국의 장단과 유사점이 있다’는 생각에 차이콥스키의 ‘만프레드 교향곡’을 춘향과 몽룡의 2인무에 적용했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치고는 잘 알려지지 않은 데다 악보조차 손에 넣기 어려운 곡이었지만 도전적으로 밀어붙였다고 전해진다. 흉포한 성정의 변학도를 묘사하기 위해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1번을, 그리고 방자와 향단이의 티키타카를 위해 관현악 조곡 1번을 가져왔다. 결과적으로 모두 차이콥스키가 <춘향전>을 발레로 만들라고 남긴 곡들일까 싶을 정도로 작품과 잘 어울렸다.

LED 화면에 디지털로 그려낸 수묵화는 한국적인 미감을 더했다. 현대의 예술, 기술의 장점을 수용해 우리 문화를 시각적으로 구현해냈다. 한국의 부드러운 산등성이, 그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 분홍색 꽃잎이 흐드러지게 핀 봄의 풍경이 탁월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요소를 최고 수준으로 보이게 만든 건, 주역 무용수들의 열연이었다. 13일 개막 공연에 선 수석무용수 강미선(2023년 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자), 이현준은 춘향의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수차례 이 작품을 경험한 인물들이다. 두 사람은 2막 마지막 장면에서 ‘해후 2인무’를 통해 고생 끝에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는 벅찬 감정을 보여줬다.

유니버설발레단의 ‘춘향’은 친숙한 줄거리에 찰떡같이 어우러진 발레의 동작, 무용수들의 테크닉과 풍부한 감정 표현으로 대중 앞에 놓인 발레의 드높은 장벽을 수차례 무너뜨리고 있었다. 서울 무대를 마무리 지은 발레 ‘춘향’은 오는 20일과 21일 대구 수성아트피아에서 열린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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