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가 작품의 해석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작품에 담긴 개인적 경험이나 견해를 최대한 감춘 채 온전히 관람자에게 해석을 맡기는 경우와 자신만의 명확한 의견과 이야기를 제시하며 감상을 적극적으로 나누는 경우다. 세르비아 출신 화가 필립 미라조비치(Filip Mirazović)는 후자에 가까운 아티스트다.
프랑스를 기반으로 30년간 꾸준히 활동해 온 화가 미라조비치가 서울 삼청동 레이지 마이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지난해 키아프(KIAF)와 아트오앤오(Art OnO) 참가 이후 올해 처음으로 국내 관람객과 만나는 자리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지난 10년간 발전시켜온 연작의 최신 작품들을 소개한다. 전시장에서 만난 미라조비치는 거리낌 없이 자신을 드러내며, 작품에 녹여낸 인생의 다양한 장면들을 들려주었다.
“이런 게 바로 아티스트의 퍼포먼스죠.” 어디선가 붓과 팔레트를 들고 나타난 작가는 재치 있는 멘트를 던지며 즉석에서 작품을 리터치하기 시작했다. 스스럼없이 작품 앞에 앉아 긁힌 자국을 손본 그는 자신을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작품이 그의 손을 떠나기 직전까지 계속해서 수정과 보완을 거듭하는 것이 그의 작업 방식이다.
필립은 고전 회화와 서브컬처를 혼합한 독창적인 회화 스타일을 선보인다. 표면적으로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형상들은 휴머노이드 형태의 로봇인 ‘테슬라봇’ 혹은 고대 조각상을 연상시킨다. 이는 그가 어린 시절 열광하던 SF소설과 ‘터미네이터’, ‘로보캅’ 등에서 받은 영향과 렘브란트, 루벤스 등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의 작품에서 받은 인상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작품 속 형상과 요소들은 작가 개인의 내밀한 경험을 함축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하나하나 뜯어 자세히 살펴보면 다양한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시간을 들여 보물찾기하듯 작품을 천천히 감상하다 보면 숨겨진 디테일을 통한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직접 작품에 담긴 의미와 이야기를 소개하는 그의 설명에는 막힘이 없었다. 모든 작품에 일대일로 특정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차원적으로 보여지는 이미지보다는 알레고리적인 의미를 더 담고 있다고 설명한 그는 “결국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겪게 되는 트라우마나 상처”라며 “많은 이들이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자신을 치유하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작품 속 형상은 주로 검은색 대리석이나 직물 같은 특정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황금빛의 흔적을 지닌다. 작품마다 이 흔적은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일 수도, 혹은 분출하고자 하는 내면의 욕망일 수도 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 ‘The gift’와 ‘Solace’, ‘Them wounds’에는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상당 부분 녹아 있다.
화려하게 치장된 갑옷을 입은 듯한 ‘The gift’에 등장하는 인물은 신체 일부분이 마치 라커가 굳어 금이 간 것처럼 균열이 나 있다. 이는 자아라는 진실된 존재가 힘을 나타내는 갑옷 밖으로 나오려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화가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gifted) 자신의 드로잉 재능을 상징하기도 한다. 팔뚝에 그려진 뱀 혹은 용처럼 보이는 동물은 보는 이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던진다. 용은 힘과 권력, 에너지를, 뱀은 유혹과 위험을 상징한다.
‘Them wounds’에 등장하는 인물의 상처는 외부로부터 가해진 충격으로 인한 것이다. 무언가로부터 공격당했지만 그 자국은 되려 황금빛으로 찬란히 빛나고 있다. 어린 시절 세르비아에서 전쟁으로 인한 폭격 현장을 마주한 적이 있는 작가는 이 경험을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명언과 연결 지어 작품에 담았다. 그는 고난 속에서도 피어나는 생명력이야말로 현재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메시지라고 강조했다.
처음으로 두 개의 형상을 등장시킨 작품 ‘Solace’에는 지쳐 쓰러진 듯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이에게 손을 내미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작가의 연인 에밀리다. 어깨부터 팔뚝까지 감싼 금빛 갑옷에는 그녀의 이니셜 ‘E’가 새겨져 있다. 작가는 자신의 삶에 들어와 손을 내밀어 준 연인과의 진실된 관계 속에서 가능한 치유의 순간을 작품에 담았다. 전시는 5월 31일까지 계속된다.
강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