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스크 몰락에 조용히 웃는 실리콘밸리
감세안 비판 후 트럼프와 갈등모드… 머스크의 스페이스X도 위상 하락
NASA-국방부와 계약 무산 위기… 블루오리진 등 후발 주자들 군침
‘앙숙’ 올트먼-저커버그-게이츠 등… 테크 거물들도 머스크 공석 노려
이달 초 세계 최강대국 지도자와 세계 최고 부자의 전례 없는 ‘브로맨스’가 시끄러운 결말을 맺자 미국 온라인 매체 액시오스는 이렇게 보도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감세 법안을 공개적으로 강하게 비판하면서 두 다혈질 거물의 치열한 설전이 시작됐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CNN 등과의 인터뷰에서 머스크를 “정신 나간 그 남자”라고 부르며 악감정을 드러냈다. 한때 자신의 ‘퍼스트 버디’(1호 친구)로 이름을 날린 머스크를 정신병자로 취급한 것.
두 사람 간에 설전이 이어지고 관계가 틀어지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한 비호 아래 최근 우주산업 관련 기업인 스페이스X 등의 사업 영역을 거침없이 확장해 간 머스크의 행보에도 브레이크가 걸리게 됐다. ‘보복 욕구’가 강한 트럼프 대통령이 머스크가 정부와 함께 진행했거나, 추진하려던 사업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선 벌써부터 머스크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한 빅테크 기업들의 이권 경쟁이 시작됐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테크 우파’(Tech Right·기술 산업에 종사하거나 기술 친화적이면서 보수적 정치 성향을 지닌 인사)들이 머스크 대신 사업적,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머스크의 퇴장, 나아가 트럼프 대통령과의 충돌로 웃고 있을 실리콘밸리 거물들의 속내를 들여다봤다.● 머스크, 올트먼 UAE 데이터센터 사업 무산 시도
지난해 미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승리하자 실리콘밸리에선 머스크와 사이가 안 좋은 기업인들이 적잖은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했다. 머스크는 지난해 대선 중 재단을 설립해 2억7000만 달러(약 3700억 원) 이상을 트럼프 선거캠프에 기부했다. 또 선거운동 기간에 트럼프 대통령의 유세 현장을 발로 누비면서 그의 핵심 측근으로 부상했다.
실제로 머스크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직후 정부효율부(DOGE) 수장에 임명돼 130일간 공무원 해고와 예산 삭감 등 연방정부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했다. 이 과정에서 머스크가 자신의 사업 영역인 전기자동차, 인공지능(AI), 소셜미디어, 우주산업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경쟁사를 견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이런 가운데 머스크가 2023년 11월 자신의 X 계정에 남긴 글은 의미심장했다. “적들로 가득 찬 큰 묘지가 있다. 여기 누군가를 더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야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머스크가 당시 겨낭했던 실리콘밸리 최대 앙숙은 생성형 AI인 챗GPT를 개발한 샘 올트먼 오픈AI CEO. 머스크는 지난해 11월 올트먼에 대해 “사기꾼 샘”이라며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올트먼에 의해 오픈AI가 당초 정관과는 달리 영리 법인으로 바뀐 것에 불만을 품은 것이다. 지난해 10월에는 올트먼에 대해 “악마로 변했다”고 직격했다. 사실 둘은 과거 절친한 사업 파트너였다. 2010년대 초반 실리콘밸리에서 스타트업 육성 기관인 와이콤비네이터 사장이던 올트먼이 온라인 결제서비스 페이팔을 창업해 성공을 거둔 머스크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그 후 올트먼이 2015년 선진 AI를 개발한다며 오픈AI를 설립하자, 머스크는 5000만 달러(약 690억 원)를 초기 투자하고 이사회 멤버에 합류하는 등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하지만 2017년 오픈AI의 주도권을 두고 이견이 생기면서 둘은 원수가 됐다. 머스크는 오픈AI가 비영리 기조를 지킨다는 약속을 어겼다며 이사회를 떠났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머스크가 CEO를 노리고 오픈AI 이사회에서 올트먼과 대립했지만, 결국 올트먼에게 밀렸다고 보도했다.
머스크는 오픈AI의 영리법인 전환을 막아 달라는 소송을 내는 등 현재까지도 올트먼과 법적 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 민주당원인 올트먼은 지난해 12월 트럼프 재선 확정 직후 위세가 높아진 머스크에 대해 “영웅으로 생각하며 자라왔다”고 말했다.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하지만 머스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올트먼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이에 올트먼은 트럼프 대통령이 목말라하는 미국 투자로 환심을 사는 전략을 취했다. 총 5000억 달러(약 690조 원)를 들여 미국에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프로젝트를 전격 발표한 것. WSJ는 당시 머스크가 해당 계약 내용을 사전에 듣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머스크는 오픈AI 주도로 아랍에미리트(UAE)에 세계 최대 규모의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계획도 무산시키려 했다고 한다. 자신의 AI 계열사 xAI가 해당 사업에서 배제된 데 따른 일종의 보복이었다. 그는 발주처인 UAE 국영기업 G42에 xAI를 사업에 참여시키지 않으면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투자 승인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머스크가 사실상 트럼프 행정부와 결별한 상황에서 올트먼의 사업 확장을 위한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 페이팔 공동 창업한 틸에 수주 경쟁력 밀릴 가능성두 사람도 사업을 둘러싼 악연을 갖고 있다. 머스크의 온라인뱅킹 업체 엑스닷컴은 틸의 온라인 결제 업체 컨피니티와 2000년 합병해 페이팔을 탄생시켰다. 이후 틸은 대표직을 맡던 머스크가 신혼여행을 간 사이 이사회를 설득해 머스크를 몰아낸 뒤 자신이 CEO에 올랐다. 신기술에 열광하던 머스크가 직원들의 거센 반발에도 시스템 교체를 강행한 게 원인이었다.
다만, 틸은 벤처캐피털을 통해 머스크의 우주탐사 기업 스페이스X에 초기 투자하는 등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않았다. 틸은 머스크의 사업 수완을 인정하며 “나라면 머스크의 반대편에 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전통적으로 진보 성향이 강한 실리콘밸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세가 취약할 때 선제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힌 공통점이 있다. 틸은 머스크보다 앞서 트럼프 집권 1기 때부터 트럼프 대통령을 지원해 왔다.
최근 머스크와 트럼프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틸의 영향력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틸은 머스크와 달리 공직을 맡지 않았지만 공화당 내 기술전략가이자 후원자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자신이 설립한 밴처캐피털 미스릴캐피털에서 일하던 예일대 로스쿨 출신의 J D 밴스를 지난해 미 대선 때 부통령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현재 부통령이 밴스란 점에서 그의 ‘용병술’은 성공한 것. 또 틸이 트럼프 행정부 내 핵심 이너서클 인사란 것을 보여준다. 틸은 실리콘밸리 안팎에서 테크 우파이자 확고한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 충성파로 꼽힌다.
이미 틸도 머스크 못지않게 연방정부 계약을 통해 실리를 취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미국의 차세대 미사일방어(MD) 체계 골든돔(Golden Dome) 프로젝트에 팔란티어의 소프트웨어가 도입될 가능성이 높다. 우버 임원 출신으로 미 국방부 연구공학(R&E) 차관에 임명된 에밀 마이클 등 틸과 가까운 관계자들이 정부 곳곳에 포진한 것도 정부 계약 수주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최근 블룸버그통신은 틸과 접점이 있는 최소 12명의 인사가 트럼프 2기 행정부에 합류했다고 전했다. 페이팔 창업 멤버로 백악관 AI 및 암호화폐 차르를 맡고 있는 데이비드 색스와 틸의 개인 재단 CEO 출신으로 미 복지부 차관에 기용된 짐 오닐 등이 대표적이다.
이미 틸이 이끄는 팔란티어는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사업자로 자리매김한 상태다. AI를 활용한 팔란티어의 군사 데이터 솔루션은 미 중앙정보국(CIA), 연방수사국(FBI), 국방부 등에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팔란티어는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주가가 90% 이상 급등하며 수혜주로 꼽히고 있다. 팔란티어 군사 솔루션을 쓰는 이스라엘군이 13일 이란 공습을 개시하자, 팔란티어 주가가 급등해 16일 기준 시가총액이 3337억 달러(약 457조 원)에 달한다.
반면 골든돔 구축 과정에서 미 국방부와 스페이스X 간 계약이 추진됐으나, 최근 트럼프-머스크 갈등 직후 계약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그 빈자리를 미국의 방산 스타트업인 안두릴 등이 파고들고 있다. 안두릴은 AI 기반 무인기, 안전관리 체계, 데이터 분석 기술을 제공한다. 안두릴은 올트먼의 오픈AI와 협력 관계다. 이에 따라 올트먼이 머스크 대신 골든돔 프로젝트의 수혜를 볼 가능성도 제기된다.
● 우주사업, 아마존 등 후발 주자들에 뺏길 위험
이달 초 워싱턴포스트(WP)는 미 항공우주국(NASA), 국방부 등이 트럼프 대통령과 관계가 틀어진 머스크와의 협력을 꺼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NASA는 스페이스X를 대신할 민간 우주기업들을 물색하고 있다. 이미 로켓랩, 스토크 스페이스, 블루오리진 등의 기술 개발 수준을 확인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중 블루오리진은 WP 사주이기도 한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가 이끌고 있다. 블루오리진은 2000년 설립돼 올 초에야 지구 궤도에 로켓을 처음 올렸다. 머스크가 지난 15년간 439차례나 로켓을 발사하고 이 중 99% 이상 성공한 것과 비교하면 기술 격차가 상당히 크다는 게 나타난다. 머스크는 블루오리진의 로켓이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며 공개적으로 조롱하기도 했다.
앞서 올 2월 머스크는 DOGE 수장 자격으로 인사관리처(OPM)를 통해 NASA 등 230여 개 정부기관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자신의 성과를 적어 내라”고 압박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선 머스크가 한 번 발사할 때마다 41억 달러(약 5조9000억 원)가 드는 NASA의 대형 로켓 발사 프로젝트를 구조조정하려는 의도로 해석했다.
그러나 머스크의 스페이스X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었다. 5일 트럼프 대통령과의 온라인 설전 끝에 머스크가 “대통령의 계약 취소 발언에 따라 스페이스X의 드래건 우주선 철수를 즉시 시작할 것”이라고 X에 올린 데 따른 것. 이후 그는 해당 글을 삭제하며 후회하는 모습을 내비쳤다. 하지만 WP에 따르면 NASA와 국방부는 머스크의 오락가락 행보를 보면서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됐다.
● 저커버그, 게이츠도 머스크와 ‘불편한 관계’
마크 저커버그 메타(페이스북 모회사) 창업자도 머스크의 퇴장을 반길 가능성이 있다. 그는 2023년 머스크가 인수한 X에 맞서 스레드를 출시한 뒤 관계가 틀어져 ‘격투기 대결’까지 서로 운운하기도 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도 머스크와의 관계가 불편하다. 2022년 테슬라 주가가 떨어질 것으로 보고 게이츠가 공매도에 나선 사실이 머스크 귀에 들어간 것. 당시 머스크는 게이츠에게 “테슬라에 대해 5억 달러(약 6900억 원) 규모의 공매도에 베팅했느냐”고 따져 묻는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머스크는 코로나19 백신 접종 캠페인을 벌이던 게이츠를 향해 자신은 백신을 안 맞겠다며 게이츠를 ‘얼간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머스크는 이후 코로나19 백신을 접종받았다.
많은 실리콘밸리 거물이 머스크와 대립각을 세웠지만 트럼프 행정부에서 머스크의 광폭 행보 덕을 보기도 했다. 머스크가 DOGE에서 정부 기능을 실리콘밸리 기술로 대체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정부 업무 영역에서 첨단 기술 도입은 테크 기업들이 그동안 요구해 온 사항이다. WP는 “DOGE는 기업이 정부보다 비용 절감과 서비스 혁신에 뛰어나다는 실리콘밸리의 주장과 보수주의 이론을 현실 세계에 적용하려 한다”고 평가했다. ‘퍼스트 버디’ 머스크의 퇴장이 테크 기업들에는 아쉬울 수 있는 대목이다.
임현석 기자 lhs@donga.com
김윤진 기자 kyj@donga.com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개
- 슬퍼요 0개
- 화나요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