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OTT 드라마 <파친코>는 1910년대 일제강점기부터 1989년 버블 경제 시기까지, 척박한 이국땅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재일조선인(자이니치)의 잔혹한 생존기다. 극 중 3세대의 긴 세월을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는 무엇이었을까. 시즌 1과 시즌 2의 전체 음식 디렉팅을 총괄하며 내린 결론은 결국 ‘한식’이다.
원작 소설은 이미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추천 도서로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이었다. 이민자의 삶 너머 자이니치의 경계인적 삶에 대해 고민하던 중, 드라마 제작사로부터 작업 제안을 받았다. 이미 원작의 팬이었기에 꼭 함께하고 싶었고, 미팅 날짜를 기다리며 열심히 자료를 수집하고 회의를 준비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소설을 각색한 대본 속 음식들은 매 장면 시대상을 반영하는 핵심 서사로 흐르고 있었다. 쇼러너(Showrunner)인 수 휴(Soo Hugh)는 파친코의 시대적 배경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다. 드라마 속 음식 중에는 배우들의 숙련된 손길이 필요한 것들도 있었기에, 촬영 전부터 회사와 촬영 현장에서 여러 차례 조리 연습을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드라마 속에서 인물 간의 감정을 연결하고 서사를 이어주는 중심 역할을 했던, <파친코>의 상징적인 밥상들을 소개한다.
눈물로 지은 하얀 쌀밥, 선자 엄마, 양진의 눈물로 만든 마지막 저녁식사
<파친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음식을 꼽으라면 단연, 선자가 고향 영도를 떠나기 전날 밤 엄마 양진이 지어준 '하얀 쌀밥'일 것이다. 당시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에게 쌀은 수탈의 대상이었다. 조선 땅에서 자란 쌀은 대부분 일본으로 건너갔고, 정작 우리 민족은 조, 수수, 보리 등으로 연명해야 했다.
양진이 일본으로 떠나는 딸에게 쌀밥을 꼭 먹이고 싶어 쌀집 주인에게 고개 숙여 겨우 구해온 두 홉의 쌀. 밥상을 준비하는 엄마의 마음에 몰입하느라 대본을 읽는 순간부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현장의 모든 스태프가 가장 감정적으로 동요했던 장면이기도 하다.
양진 역의 정인지 배우와 선자 역의 김민하 배우는 촬영 전에 수차례 요리를 배웠고, 촬영할 때 대역 없이 모든 과정을 직접 소화했다. 조리로 쌀을 일며 돌을 거르고 가마솥에서 구수한 김을 내며 밥이 지어지던 순간은 지금도 또렷하다.
정성을 다해 음식을 차려내는 양진의 모성애 가득한 밥상, 그리고 놋그릇에 담긴 하얀 쌀밥, 그리고 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밥을 먹던 선자의 모습. 이 장면에선 현장의 모든 스태프가 함께 눈물을 훔쳤다. 4부 방영 이후에도 이 장면이 오랫동안 회자된 것을 보면, 그날 현장의 온기가 화면을 넘어 시청자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숙집 어부들의 밥상, 민초들의 거친 생명력
영도의 선자네 하숙집에서 어부들이 다 함께 모여 밥을 먹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극 중 가장 생동감 넘치고 인간미가 넘치는 장면 중 하나다.
매일 거친 바다로 나가는 어부들의 밥상인 만큼, 상차림 역시 투박하고 거친 느낌을 주고자 했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 선자네 하숙집에 모여 사는 어부들이 한데 둘러앉아, 술 한잔을 기울이며 일제강점기 조선인으로서의 처지를 한탄하는 서글픈 장면이었다.
이 상차림을 위해 영도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듯한 생선구이와 탕, 반찬 등을 정성스레 준비했다. 그리고 대본에서 무엇보다 중요했던 음식은 어린 선자가 바다에서 직접 잡은, 선자의 얼굴만 한 크기의 자연산 전복이었다. 이 대형 전복을 구하기 위해 완도, 통영, 부산, 제주도까지 전국의 산지를 수소문하며 발품을 팔았다. 촬영 날짜는 다가오는데 혹시나 구하지 못하면 어쩌나 발을 동동 구르며 오랜 시간 공을 들인 끝에, 손바닥만 한 전복을 준비할 수 있었다.
촬영 당시 배우들이 실제로 음식을 먹으며 대사를 하고 노래를 불러야 했기에, 시각적인 고증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간과 맛에 신경을 많이 썼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밥을 나누고, 조선인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어부들의 모습을 잘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선자와 김치, 생존과 정체성의 불씨
선자가 일본으로 건너간 후, 생계를 위해 시장에서 김치를 팔기 시작하는 서사는 배척당하고 무시당하던 그녀가 오뚝이처럼 굳게 버텨내는 힘이었다. 선자의 엄마 양진은 요리 솜씨가 좋았고 그 옆에서 선자가 양진의 요리를 많이 배웠다. 선자가 일본에서 김치를 팔게 되는 모티브는 영도에서 살 때 김치를 장독에서 꺼내고 썰던 어린 선자의 모습과 연결된다. 장독대에서 김치를 꺼내 툭툭 써는 장면 하나하나도 모두 많은 공을 들여 준비했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 드라마에서 김치는 단순한 반찬이 아니라, 낯선 땅 일본에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시각적 오브제'였다. 그 옛날 영도 시골에서 김치를 담갔을 때는 어떤 색감이었을까. 가장 신경 쓰며 만들었던 것은 질감과 색감이었다. 방금 담근 겉절이 같은 김치로는 타향살이의 깊은 세월을 담아낼 수 없기에, 우리 팀은 삭은 장독대 분위기와 어우러져 깊은 맛을 뿜어내는 김치의 비주얼을 만들기 위해 단면을 썰 때 흘러내리는 국물의 점도와 배춧잎의 절임 상태까지 디테일하게 신경 썼다.
음식은 기록보다 오래 남는다
1910년대 부산 영도의 투박한 부엌부터, 타국에서 눈물로 버텨낸 오사카의 시장 바닥, 그리고 1989년 세련되지만 어딘가 쓸쓸한 도쿄의 식탁까지. <파친코> 시즌 1과 2를 아우르는 음식들을 만들며 매 순간 느낀 것은 "음식은 역사보다 강하다"는 점이었다.
엄마가 지어준 밥맛의 기억, 고향의 김치 냄새는 대를 이어 이어진다. 이민진 작가가 원작 소설에서 그려낸 그 시대 우리 조상들의 음식들을 드라마에서 시각적으로 더욱 우리 마음에 파고들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단순한 시대적 고증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슬픔과 기쁨, 그리고 끈질긴 생명력을 대변하는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번 작품에서도 음식이 시대를 보여주는 배경을 넘어, 인물들의 삶과 감정을 함께 전하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장면, 한 장면을 준비했다. <파친코>는 개인적으로 너무도 사랑했던, 정말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시는 모든 분들이 이 열정을 함께 느끼길 바란다.

4 hou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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