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자나 중장년층을 상담하다 보면 자주 던지는 질문이 있다. “앞으로 노후에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많은 분들이 이렇게 대답한다. “가족이 모두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자녀들이 결혼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참 좋은 소망이다.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면서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져본다. “가족들 말고, 정작 본인이 원하는 것은 없으신가요?”
이 질문 앞에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글쎄요...”라고 하거나, “저는 특별히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평생 누군가를 위해 살아온 사람일수록,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 질문 앞에서는 낯설어한다.
아내는 남편의 행복을 바라고, 남편은 아내가 행복하기를 원한다. 부모는 자녀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고, 자녀는 부모의 편안한 노후를 희망한다. 서로의 행복을 바라고 응원하는 모습은 분명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과연 나의 행복이 온전히 채워질 수 있을까? 나의 행복을 다른 사람의 행복에만 기대고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타인에게 맡기는 일은 아닐까?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라는 말이 있다. 이타주의는 타인의 이익과 행복을 우선하는 태도이고, 이기주의는 자신의 이익과 행복을 우선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기주의보다는 이타주의가 더 긍정적이고 환영받는 태도처럼 여겨진다. 공동체 안에서 배려와 양보는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고, 함께 살아가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노후에는 조금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남을 짓밟고 내 이익만 챙기자는 뜻이 아니라면, 오히려 어느 정도의 ‘건강한 이기주의’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행복만을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기보다, 이제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태도가 노후에 꼭 필요한 덕목이 될 수 있다.
수년 전 상담에서 만난 한 60대 여성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그분은 평생 전업주부로 살아왔다. 남편 뒷바라지와 자녀 교육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그런데 자녀들이 결혼하고 독립한 뒤, 갑자기 우울감이 찾아왔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하루 종일 TV만 보며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아졌다.
상담 중에 물었다. “어릴 적 좋아했던 것이 있었나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분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글 쓰는 걸 좋아했어요”. 그 말이 작은 출발점이 되었다. 그분은 지역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동네의 역사와 이야기를 기록하는 활동에도 함께하게 되었다. 몇 년 뒤 다시 만났을 때,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제 인생을 사는 것 같아요”. 거창한 변화는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좋아했던 일을 다시 시작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작은 선택이 삶의 만족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노후에 필요한 것은 반드시 거대한 목표가 아닐 수 있다. 좋아하는 책을 읽는 것, 배우고 싶었던 악기를 배우는 것, 여행을 떠나는 것, 글을 쓰는 것, 봉사활동을 하는 것,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는 것. 중요한 것은 그 일이 남의 기대 때문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노후에는 자신에게 묻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나는 무엇을 할 때 즐거운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배려라는 이름으로 늘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먼저 반응해 왔다면, 이제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은퇴 이후의 삶은 어쩌면 처음으로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평생 가족과 직장, 사회를 위해 살아왔다면 이제는 온전히 자신을 위해 살아도 괜찮다.
누군가는 그것을 이기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태도라면 그것은 이기주의가 아니라 건강한 자기돌봄이다.
이제 노후에 필요한 것은 더 이상 배려와 희생이 아니다. 오히려 “내 삶의 주인은 나”라는 아주 단순한 진실을 다시 발견하는 일, 그리고 자신을 삶의 우선순위 맨 위에 올려놓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윤형진 칼럼니스트, 한국생애설계사(CLP), 울산 동구 노동자지원센터 생애설계 상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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