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에 처음 상연된 뮤지컬 <일 테노레>는 한국 오페라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테너 이인선의 이야기를 극화한 작품이다. 1920년대 중반부터 촉망받는 성악가로 활동했고,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해 의사가 되었는데도 노래에 대한, 특히 오페라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그의 이야기는 예술가의 극적인 실제 삶이 웬만한 허구를 능가하는 실례로 꼽히기에 충분하다.
이인선이 한국 오페라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1948년 1월 <춘희>, 즉 <라 트라비아타>와 1950년 1월 <카르멘>의 상연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두 작품에서 모두 주인공 역을 맡은 것은 물론 가사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직접 했고, 실질적으로 제작을 총지휘하는 역할까지 담당했다. 만약 이인선이 없었더라면 아마 공연이 성사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이인선이 주도한 두 작품은 통상 한국 최초와 세 번째 오페라 공연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앞서 1937년 5월에 <호접부인>, 즉 <나비부인>이 경성 부민관에서 상연된 바 있지만, 주연을 맡은 소프라노 미우라 타마키(三浦環)를 비롯한 관계자 거의 모두가 일본인이었다. 테너 김영길과 조영은만 참여한 정도였기에, 한국인에 의한 오페라로 인정되지는 않는다. 또 학계 일각에서는 안기영의 작품으로 1941년 8월에 상연된 ‘향토가극’ <견우직녀>를 한국 오페라의 효시로 꼽기도 하지만, 아직 통설로 자리 잡지는 못한 상황이다.
이인선이 본격적으로 오페라 전편을 무대에 올렸을 때는 해방 후인 1948년이었으나, 훨씬 전부터 음반이나 방송, 공연 등 개인 활동을 통해 그는 이미 한국 오페라의 선구자다운 면모를 충분히 보여 주고 있었다. 1934년 봄 이탈리아 밀라노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는 오케 레코드에서 노래 열 곡을 녹음했는데, 그 가운데 두 곡이 오페라 아리아인 <리골레토>의 '여자의 마음'과 <세르세>의 '이 같은 그늘 결코 없어라'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 1928년 10월에는 경성방송국에 출연해 이지순과 듀엣으로 <카르멘>의 한 대목을 부르기도 했다. 정확히 어떤 곡인지는 지금 알 수 없으나, 거의 100년 전에도 오페라 <카르멘>이 부분적으로나마 조선인에 의해 연주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 기억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오페라까진 아니어도 이야기로서 <카르멘>은 다양한 형태로 1920년대 조선에서 상당히 친숙한 작품이기는 했다. 우선 1921년 10월부터 두 달 동안 <조선일보> 지면에 나도향이 번역한 소설 <카르멘>이 연재되었다. 이어 1924년 6월에는 극단 토월회에서 연극 <카르멘>을 상연했는데, 1926년 2월에 다시 상연할 때는 <사의 찬미>로 유명한 소프라노 윤심덕이 배우로서 주연을 맡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1928년 3월에는 또 프랑스 감독 자크 페데가 연출한 무성영화 <카르멘>이 서울에서 상영되었고, 연극과 영화 <카르멘>은 각각 1927년과 1930년에 축약본 음반으로 발매되기도 했다. 하고많은 오페라 걸작들 가운데 이인선이 두 번째 작품으로 <카르멘>을 선택했던 데에는, 이처럼 대중에게 일찍부터 친숙했다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오페라 <카르멘>은 1950년 1월 27일 서울 시공관, 현재 명동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2년 전 첫 작품 <춘희>의 경험을 토대로 오랜 준비를 거치고 거금 700만원 경비를 들여 선보인 이인선의 <카르멘>은 2월 2일까지 하루 두 차례씩 공연을 이어갔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름의 성취를 이루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렇게 <카르멘> 무대를 마친 이인선의 심중에는 어쩌면 개운치 않은 부담이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의 오페라와 이래저래 비교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카르멘>이 바로 같은 1월 초에 앞서 상연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 1월 1일, 무대도 같은 시공관에서 먼저 막을 올린 작품은 ‘음악시극(詩劇)’ <칼멘 환상곡>이었다. 당시 대중적 인기 면에서 가장 주목받는 단체였던 K.P.K악단의 리더 김해송이 야심차게 준비한 작품으로, 오페라 <카르멘>의 이야기와 음악을 큰 줄기로 차용하되, 창작곡을 비롯한 다른 음악 자원과 대중적 연출을 대폭 가미한 일종의 뮤지컬이었다. 4막인 오페라와 달리 <칼멘 환상곡>은 9경(景), 즉 아홉 장면으로 재구성되었고, 김해송은 이인선 못지않게 제작비 500만 원을 조달해 무대를 꾸몄다고 한다. 상연 기간은 <칼멘 환상곡>도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이레였다.
대본이나 악보 같은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칼멘 환상곡>의 구체적인 내용을 지금 알기는 어렵지만, 당시 신문에 실린 공연 평을 보면 그 일단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오페라 <카르멘>의 주요 아리아인 '하바네라' '집시의 노래' 등을 편곡해 사용하는 한편, 스페인 민요와 김해송이 특별히 좋아했던 작가로 보이는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 제4악장 같은 것도 적절히 편곡해 버무려 넣었다. '세기데리아의 노래' 등 김해송이 새로 만든 곡들도 여럿 추가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신문 기사뿐만 아니라 <칼멘 환상곡>의 주연으로 인상적인 춤과 노래를 선보여 호평받은 가수 백설희의 구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타계하기 3년 전인 2007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로 구술을 남긴 백설희는, 악보나 음반에 전혀 실린 바 없는 '세기데리아의 노래'를 짧게나마 직접 불러 귀중한 기록을 남겼고, <칼멘 환상곡> 공연 당시 여러 상황을 선명한 기억으로 이야기했다. 관람을 온 외무장관 임병직과 공연 뒤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는 그의 기억은, 역으로 신문 기사를 통해 사실로 또 확인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기간으로 상연된 오페라 <카르멘>과 음악시극 <칼멘 환상곡> 중 어떤 작품이 더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김해송의 <칼멘 환상곡>이 석 달 뒤 4월에 다시 무대에 올랐던 반면 이인선의 <카르멘>은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다. 공연 평에서도 <칼멘 환상곡>에 대한 호감이 좀 더 느껴지는 편이긴 한데, 이는 어쩌면 그 무렵 악극이나 가극으로 불렸던 뮤지컬의 예술성에 대한 식자층의 부정적 선입견에서 비롯한 기저효과(?)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각자의 <카르멘>으로 명동 시공관에서 의도치 않은 대결을 펼쳤던 이인선과 김해송 사이에는 작품 외 다른 면에서 예사롭지 않은 인연이 또한 있었다. 4~5년 정도 나이 차이는 있었지만 둘 다 평안도 출신이었고, 무엇보다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 선후배 사이이기도 했다. 음악 활동의 시작은 선배 이인선이 훨씬 빨랐지만, 두 사람 모두 오케레코드와 각별한 관계였다는 점도 주목되는 또 다른 공통점이다. 오케레코드 운영자였던 이철은 이인선의 처음이자 마지막 음반 녹음을 주선한 것은 물론, 그의 이탈리아 유학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다. 김해송 역시 이철의 발탁과 지원을 받아 1935년 오케레코드에서 데뷔했고, 이철이 이끌었던 조선악극단에서 1939년부터 중추로 활약하며 훗날 K.P.K악단 단장의 역량을 키웠다.
활동 분야와 방향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어도 열정과 재능 면에서는 똑같이 출중했던 <카르멘> 주역 두 사람의 음악 행로는, 그러나 75년 전 6월에 일어난 비극적 전쟁으로 큰 타격을 받아 굴절되고 말았다. 의학과 음악을 더 공부하기 위해 1950년 4월 초 미국으로 건너간 이인선은 다행히 끔찍한 전화(戰禍)를 직접 겪지 않았지만, 1960년 3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끝내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디션에 합격했다고는 하나, 미국에서 그의 음악 활동은 이전처럼 활발하게 펼쳐지지 못했다. <칼멘 환상곡> 등 여러 작품의 성공에 힘입어 하와이 공연과 미국 진출을 모색했던 김해송은 전쟁 발발 직후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그 꿈을 결국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퇴각하는 북한군에게 끌려가다가 폭격을 맞아 목숨까지 잃고 말았다.
자료가 너무나도 부족해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은 <칼멘 환상곡>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그나마 들어 볼 수 있는 노래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오케레코드 1941년 9월 신보로 발매된 '마음의 포구'라는 작품으로, 김해송의 곡이자 <칼멘 환상곡>에 백설희 상대역으로 남장하고 출연했던 김해송의 아내 이난영이 부른 노래다. <칼멘 환상곡>에 사용되었던 아리아 '집시의 노래'가 바로 그 '마음의 포구'에도 녹아들어 있다.
이준희 대중문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