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만 잘하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라는 말을 믿던 때가 있었다. ‘훌륭한 사람’이 무엇인지보다는 ‘된다’에 초점을 맞췄고, 어른들 말을 따라 높은 점수와 남들이 인정하는 대학, 직장을 좇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믿음에 이상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내로라하는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권력이나 영향력을 엉뚱하게 휘두르는 일들을 보게 된 것이다. 악의가 뚜렷한 악보다, 훌륭한(줄 알았던) 사람들의 바보 같은 선택이 발현하는 악을 볼 때 더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훌륭한 사람의 정의에 ‘자신이 속한 공동체나 자기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택을 할 줄 아는 분별력‘이 포함되어 있다면, ‘똑똑함’은 훌륭함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닌 것 같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
지식이 나를 무장해 줄 것이라는 방어 기제는 여전히 관성처럼 작동하며 최대한의 아는 척과 지적 허영심을 부추기지만, 지식만 움켜쥔 바보가 되긴 싫다. 나도 모르는 사이 악의 도구가 되는 건 더 끔찍하다. 무엇으로 이를 막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일이 가능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한나 아렌트의 사상에서 답을 구하기로 했다. 그의 답은 분명했다. 똑똑함이 아니라 ‘사유하는 능력’만이 그러한 일에 맞설 수 있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장교였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방청한 뒤, 그 기록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남겼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수용소로 이송하는 체계를 관리하며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았다. 그러나 그가 재판받는 동안에는 후회나 죄의식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그 이유가 강력한 신념이나 유대인 혐오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아이히만은 체제가 주입한 어휘나 문장, 자신이 한번 사용한 말들을 진부하리만치 반복했는데, 아렌트는 이러한 ‘상투어’가 그에게 사유의 능력이 부재하다는 증거라고 보았다. 아렌트는 여기서 말과 사유 능력이 부재한 이라면 누구라도 파멸을 불러올 수 있다는 ‘악의 평범성’을 통찰했다.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한나 아렌트, 김선욱 옮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그가 말하는 ‘사유’는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지식을 우선시하고 그것에 계급을 부여하는 사회는 ‘너’를 지우고 ‘나’만 앞세우기를 종용한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는 수고는 방해물일 뿐이다. 철저하게 관료제적, 위계적이었던 나치 독일 사회의 아이히만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대부분의 일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으나, 자신의 진급과 직접 관련된 일만큼은 생생히 기억했다. 심지어 경찰 심문을 위해 마주한 독일계 유대인 앞에서 자신이 승진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는 일화를 들으면, 분노보다도 캄캄하리만치 깊은 답답함이 몰려온다.
인간에 희망 품게 한 헨델 <메시아>
내가 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음악 칼럼인 줄 알았는데 이게 뭔가’ 싶을 것 같다. 글쓴이에게 일말의 사유 능력은 있으니 조금만 더 믿어주시길 바란다. 앞서 언급한 깊은 답답함의 기저에는 확고한 무력감이 존재한다. 사유에 무능하다고 생각되는 대표적 얼굴들 몇몇만 떠올려봐도, 그들이 하루아침에 타인의 입장을 살뜰히 살피며 말하거나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허탈함을 한나 아렌트야말로 더 또렷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보다 앞서 출간한 『인간의 조건』에서, 이 세계에 믿음과 희망을 품어도 된다는 강한 확신을 표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1952년, 뮌헨 필하모닉의 연주로 감상한 헨델의 <메시아>였다.
뮌헨 필하모닉이 연주한 헨델의 <메시아>... ‘할렐루야 합창’이 아직도 내 귀에 울려. ‘우리를 위해 한 아이가 나셨다'라는 부분이 얼마나 놀라운지 그때 처음 깨달았어. 기독교에도 좋은 면이 있었던 거야.-한나 아렌트·하인리히 블뤼허, 로테 쾰러 엮음, 피터 콘스탄틴 영어 번역, 챗GPT·필자 한역 『Within Four Walls』
‘우리를 위해 한 아이가 나셨다(For unto us a child is born)’는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열두 번째 곡이다. 한나 아렌트가 이 곡을 감상한 경험은 6년 뒤 저서 『인간의 조건』에 새겨졌다.
이 세계에서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이 세계를 위한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가장 웅장하면서도 간결한 말은, 복음서가 ‘기쁜 소식’을 천명한 몇 마디 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도다.”- 한나 아렌트, 이진우 옮김 『인간의 조건』 (한길사)
아렌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태어남으로써 세상에 새로움을 불러오는 존재다. 그는 인간 세상을 황폐화로부터 구원하는 기적이 바로 이 ‘탄생성’에 있다고 단언한다. ‘태어난 자라면 누구나 새로울 수 있다’라고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막막함이 좀 달래지는 듯하다. 한나 아렌트 연구자 모리카와 테루카즈는, 아렌트가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도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이유가 헨델의 <메시아>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아렌트는 자신의 노트에도 이 오라토리오에 “모든 새로운 탄생은 이 세상에 행복을 보장해 주는 약속”이라는 진실이 담겼다고 적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테루카즈는 아렌트가 ‘한 아이’를 특정한 메시아가 아닌 ‘모든 탄생’으로 해석했다고 밝혔다.
기적 속에서 탄생한 오라토리오 <메시아>
<메시아>는 헨델이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와 기적적으로 작곡한 작품이다. 츠바이크는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 이 작품의 탄생 과정을 박진감 있게 전한다. 본래 헨델은 런던에서 이탈리아 오페라 붐을 이끌며 엄청난 인기와 부를 쌓았다. 그러나 유행이 시들해지면서 경영난에 빠졌고, 설상가상 뇌졸중까지 겹쳐 몸 오른쪽을 거의 쓸 수 없게 됐다. 오른손으로 건반 하나 누를 수 없는 상황에서 필사적인 의지로 9시간씩 온천 치료를 이어간 끝에 겨우 회복했지만, 왕비의 서거와 영국의 전쟁으로 그의 빚은 더욱 늘어만 갔다.
절망의 나락에 빠져있을 무렵, 헨델은 대본 작가 찰스 제넨스로부터 받은 대본에 운명처럼 매료돼 혼신을 다해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했다. 해럴드 숀버그는 헨델이 종교적 음악극인 오라토리오에 눈을 돌린 이유가, 실익에 밝아 가장 많은 수익을 가져다줄 사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헨델은 자신에게 일종의 영적 체험과도 같았던 <메시아>만큼은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지 않았던 듯하다. 츠바이크에 따르면 헨델은 해마다 런던에서 이 작품을 공연했는데, 매번 수익금 전액을 기부했다고 전해진다.
우리 안의 아이히만과 메시아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탄생성’을 생각하는 동안 론 뮤익의 작품 <A Girl>이 생각났다. 갓 태어난 신생아의 모습을 약 5m의 크기로 제작한 이 작품을 실제로 보면 ‘갓난아기’를 떠올릴 때 상투적으로 연상되던 미지근한 냄새나 사랑스러움은 지워진다. 이 작품은 막 태어난 아기 몸에 묻어있는 핏자국, 고단한 표정, 퉁퉁 부은 눈과 깊은 주름, 아직 연한 발톱 같은 것들을 눈앞에 거대하게 펼치며 ‘태어남’의 의미를 새롭게 되묻는다.
탄생이라는 험난하고도 고된 여정을 거쳐 세상에 존재하게 된 우리는 그 가능성을 스스로 선택하고 이어가야 한다.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관습을 의심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사유의 힘을 기르면서. 그래야만 우리 안의 아이히만 대신 메시아에게 기회를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지난하고, 혼란으로 가득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헨델의 <메시아>를 위안 삼으면 어떨까. 한나 아렌트가 이 곡에서 인간에 대한 틀림없는 확신을 발견했듯이.
[Handel: Messiah, For unto us a child is born (Sir Colin Davis, Tenebrae, LSO)]
김수미 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