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3위’ 꼬리표를 달고 있던 미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이 최근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고성능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면서 HBM 공급망에 진입한 마이크론의 점유율이 빠르게 확대되는 가운데 공격적인 미국 내 투자 계획까지 발표하며 반도체 산업 지형을 뒤흔들고 있다.
단기 실적뿐 아니라 생산능력(CAPA), 고객 네트워크, 패키징 기술 등에서 다방면의 전략을 병행하고 있는 마이크론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함께 ‘AI 메모리 삼강 체제’ 구도를 형성할 잠재력으로 주목받고 있다.
HBM3E→HBM4로 직행…AI 메모리 시장서 ‘초고속 추월’
마이크론은 지난 3월 HBM3E(5세대) 12단 제품 양산에 성공한 데 이어 최근에는 차세대 HBM4 샘플을 주요 고객사에 출하했다고 밝혔다. 이는 업계 선두인 SK하이닉스와의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히는 한편, HBM3E 인증 지연으로 주춤한 삼성전자를 바짝 추격하는 행보다.
특히 엔비디아 AI 반도체 공급망에 진입한 것이 핵심 전환점으로 꼽힌다. 마이크론은 HBM3E 8단 및 12단 제품 모두를 엔비디아에 공급 중이며 전력 효율과 수율 측면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마이크론의 글로벌 D램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2분기 19.2%에서 올 1분기 25%까지 상승하며 삼성전자와의 격차를 빠르게 좁히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여전히 HBM 시장 점유율 1위(2023년 52.5%)를 유지하고 있으나, 마이크론은 HBM4 조기 샘플 출하와 AI 메모리 수요 확대에 힘입어 올해 말까지 HBM 시장 점유율을 20%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감자 판 돈’으로 시작한 회사, 미국 반도체 재편의 중심으로
1978년 미국 아이다호주 보이시에서 설립된 마이크론은 창업 초기 미국 ‘감자 재벌’로 알려진 심플롯 가문이 자금을 댄 이색 이력을 지닌 기업이다. 한때 저가형 D램으로 시장을 공략했으나, 이후 도시바 D램(2001년), 엘피다 메모리(2013년) 등을 인수하며 글로벌 메모리 3강 체제로 올라섰다.
최근에는 기술 리더십 확보에도 집중하고 있다. 마이크론은 업계 최초로 6세대 1β(1-beta) D램, 232단 낸드 플래시 등을 개발했으며, 차량용·그래픽용 메모리 시장에서는 일부 제품군에서 업계 1위에 올라 있다. 엔비디아의 GDDR7 채택 발표에서도 마이크론이 ‘대표 파트너’로 공개 언급되며 브랜드 신뢰도도 높이고 있다.
마이크론은 미국 내 생산 능력 확대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6월 초, 기존 계획보다 300억달러 늘어난 총 2000억달러 규모의 미국 내 반도체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이 중 1500억달러는 메모리 생산에 투입되며, 나머지는 연구개발(R&D), 패키징, 인력 양성 등에 사용된다.
미 상무부는 이에 맞춰 마이크론에 최대 2억7500만달러 규모의 반도체법 보조금을 추가 지급하기로 했다. 앞서 지난해 말에는 61억6500만달러 규모의 보조금을 확정한 바 있다. 반도체법 보조금과 각종 세금 인센티브를 통해 마이크론은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원하는 ‘대표 메모리 국산화 기업’으로 부상했다.
이와 함께 마이크론은 TSMC 전 회장 마크 리우를 이사회에 영입하고 AI 고객사 중심의 클라우드 메모리 사업부(CMBU)를 신설하는 등 고부가 AI 메모리 집중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기술력은 입증, ‘신뢰성’과 ‘양산력’이 변수
마이크론은 엔비디아 공급망 진입 이후 AI용 메모리 품질에 대한 시장 신뢰도를 빠르게 높이고 있다. HBM 제품 수율 역시 과거 약점으로 지적받았지만, 최근 한미반도체의 TC 본더 기술을 활용해 HBM3E 12단 수율을 70% 수준까지 끌어올린 것으로 업계는 평가하고 있다.
다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양산 안정성 및 고객 기반이 여전히 더 탄탄하다는 평가도 병존한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AMD용 HBM3E 12단을 납품하며 성능 논란을 반전시켰고, SK하이닉스는 HBM3E 시장에서 단연 선두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마이크론이 ‘점유율 확대→양산 안정화→기술 신뢰도 확보’라는 3단계를 모두 충족시키려면 하반기 고객사의 후속 발주 성과가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AI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메모리 반도체, 특히 HBM 수요가 폭등하는 가운데 마이크론은 ‘3위 업체’라는 꼬리표를 떼고 미국 반도체 산업 재건의 중심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는 기술력뿐 아니라 산업 생태계를 둘러싼 전략 경쟁이 본격화되는 양상이다. 고수익 구조의 HBM 시장을 놓고 ‘고객사-공급망-국가 전략’까지 얽힌 다층적인 경쟁 구도가 형성되는 가운데 마이크론의 행보가 반도체 시장의 구조 재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이소현 기자 y2eon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