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반도체 호황을 기존 국내총생산(GDP) 통계 체계가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인공지능(AI) 반도체 가격 급등과 수출 호조가 1분기 실질 GDP 증가율(1.7%)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다만 물가 상승분까지 반영한 명목 GDP는 올해 두 자릿수 성장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상황인만큼 정부의 확장 재정 기조에 힘이 실릴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8일 김 실장은 페이스북에 '코스피 7500, 그리고 1만의 문턱 앞에서'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대한민국의 재정과 거시 전망은 GDP성장률 전망을 기초로 움직이지만 이번 반도체 호황은 기존 GDP 체계가 포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반도체처럼 품질 개선 속도가 가격 변화를 압도하는 산업에서는 기존 통계 체계가 현실 변화를 너무 느리게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HBM처럼 성능·집적도·전력효율이 동시에 개선되는 제품은 가격 상승과 실질 생산 증가를 분리해 측정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고 강조했다.
김 실장은 "무역수지는 월별로 사상 최대 행진 중이다. 4월 수출은 전년 대비 48% 증가했고, 반도체만 따지면 173%가 넘는다. 어느 하나도 평범한 경기 순환에서 나오는 숫자가 아니다"고 평가했다. 이어 "시장은 이미 이 변화를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했지만, 거시경제 통계와 정책 시스템은 그것을 실시간으로 따라가기 어려운 구조"라고 지적했다. 그는 "반도체 호황에 따라 올해와 내년 세수는 역사적 규모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며 "재정 역시 과거 평균값에 묶인 사고에서 벗어나 좀 더 유연하고 넓은 시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 발표된 1분기 실질 GDP 증가율(1.7%)에 슈퍼 랠리를 지속하고 있는 반도체 업황이 충분히 담기지 않았다는 얘기다. 김 실장이 이렇게 지적하는 이유는 실질 GDP는 가격 변수를 제거하고 한 국가의 경제에서 얼마나 많은 재화·서비스가 생산됐는지를 계산하는 지표라는 데 있다. 생산량은 그대로인데 가격만 높아졌을 경우 물가가 오른 것이 '성장의 착시'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김 실장은 "지금의 GDP 프레임워크 자체가 20세기 제조업 경제를 기준으로 설계된 측정 체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동차는 몇 대 만들었는지, 냉장고는 몇 대 팔렸는지 같은 전통적 산업 기준을 토대로 발전한 경제 지표라는 뜻이다.
최근 HBM 등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용 반도체는 심각한 공급 부족으로 인해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간 상황이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1분기 영업이익은 각각 756%, 405% 폭증했다. 이 같은 가격 수치가 제거된 채 늘어난 물량만 반영된 게 1분기 실질 GDP 증가율이라는 의미다.
또한 실질 GDP는 생산량의 순수한 변화만 보기 위해 기준 연도의 가격을 고정해서 계산한다. 올해 실질 GDP를 산출할 때 사용하는 가격 기준 연도는 2020년이다. 기준 연도가 2020년이더라도 반도체의 기술 발전 여부가 아예 반영하지 않는 건 아니다. 한국은행은 '연쇄가중법'을 도입해 매년 변화하는 가격 가중치도 반영하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가격 기준 연도는 2020년이지만 당시에는 없었던 HBM이라는 새로운 상품의 등장 효과는 이번 실질 GDP에 어느정도 반영됐다"고 말했다. HBM이라는 새로운 반도체 상품을 1분기 GDP 산출시 반영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HBM이라는 새로운 변수의 등장 자체가 생산 물량이 늘어난 원인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산출 시 반도체 업종 내 HBM 비중은 올라가고 D램이나 낸드의 비중은 크게 내려갔다"며 "반도체의 처리 용량 등도 반영된다"고 설명했다.
김 실장은 "결국 지금 국면에서 현실을 가장 빠르게 보여주는 건 무역수지, 수출 데이터, 그리고 기업 영업이익"이라며 "재정이 과거 평균 값에 묶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의 재정 지출 계획은 실질 GDP가 아닌 가격 변동폭까지 반영한 명목 GDP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짜여진다는 점에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지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정부의 돈을 얼마나 쓸지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세입 추계는 물가가 포함된 명목 GDP를 기준으로 한다. 생산량을 기준으로 한 1분기 실질 GDP는 1.7% 늘었지만, 1분기 명목 GDP는 두 자릿수로 급증했을 것로 추정된다. 1분기 국내총소득(GDI)은 전 분기 대비 7.5%, 전년 동기 대비 12.3% 늘었다.
한은 내부에서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심각하게 늘어지지 않는 한 올해 명목 GDP 성장률이 두 자릿수를 기록할 확률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명목 GDP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시기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은 "소비자 물가가 10%를 넘겼던 60~70년대에는 실질 GDP가 경제 성장을 더 정확히 보여주는 척도였지만 지금은 반도체 시장이 철저한 공급 우위 시장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명목 GDP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성장률이 현실화한다면 정부의 확장 재정 정책 여력도 더 커질 수 있다. 김 실장은 "세입 추계 등 재정 정책에 있어 더욱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현 정부의 기조인 '확장 재정'에 더욱 힘이 실릴 수 있다는 메시지로도 읽힌다.
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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