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형에도 거버넌스는 있다: "누가 선택지를 설계하는가"

1 day ago 5

[칼럼니스트=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가입자가 직접 고른 상품인데, 왜 회사나 금융기관에게 책임을 묻습니까?” 한국 퇴직연금에서 자주 듣는 말입니다. 겉으로 보면 맞는 말처럼 보입니다. 계약형 퇴직연금에서 가입자는 상품 목록을 보고 스스로 고릅니다. 원리금보장상품을 고른 것도 가입자이고, 펀드를 고른 것도 가입자입니다. 그러니 결과도 가입자의 선택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가입자는 과연 아무런 설계도 없는 빈 공간에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일까요? 아니면 누군가 이미 만들어 놓은 메뉴판, 기본값, 설명 방식, 위험 문구, 상품 배열 안에서 선택한 것일까요? 앞선 세 장에서 우리는 네덜란드의 기금, 암박츠히어의 거버넌스 품질 연구, 캐나다의 운용 독립을 보았습니다. 모두 독립된 기금이나 위원회를 가진 세계였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처럼 계약형이 주류인 제도에서는 거버넌스가 없는 것일까요? 이 장의 답은 다릅니다. 계약형에도 거버넌스는 있습니다. 다만 이사회라는 이름으로 보이지 않을 뿐, 선택지를 설계하는 손으로 숨어 있습니다. 이 점에서 미국 401(k)는 흥미로운 중간 사례입니다. 그것은 네덜란드 산업별 기금이나 캐나다 CPP처럼 하나의 독립 기금이 모든 가입자를 대신해 운용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기업이 플랜 스폰서가 되고, 기록관리기관·운용사·펀드와 계약을 맺고, 근로자는 그 안의 상품을 선택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401(k)는 분명 계약형에 가깝습니다. 그런데도 미국은 그 계약형 구조 안에 수탁자 책임, 상품 선정 책임, 디폴트 투자상품 감시 책임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401(k)는 한국 계약형을 비추는 데 더 좋은 거울이 됩니다. [본 이미지는 AI 기술을 활용해 제작되었습니다.]2001년 미국, 서류 한 장이 연금을 바꾸다 2001년, 경제학자 브리지트 매드리언과 데니스 셰이는 한 대기업의 401(k) 가입 자료를 분석했습니다. 회사가 바꾼 것은 거창한 투자 전략이 아니었습니다. 가입 방식을 바꿨습니다. 이전에는 직원이 직접 신청서를 내야 401(k)에 가입됐습니다. 이것이 opt-in입니다. 바뀐 뒤에는 직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가입됐고, 싫으면 빠져나가면 됐습니다. 이것이 opt-out입니다. 돈의 성격도, 세제 혜택도, 회사의 제도도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뀐 것은 기본값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컸습니다. 자동가입이 적용된 신입 직원의 참여율은 크게 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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