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엔,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들이 있다

9 hours ago 1

“어? 여기 분명히 뭐가 있었는데…”

익숙한 골목이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낯선 건물이 들어선 풍경 앞에서 우리는 종종
멈칫한다. 도시는 매일 조금씩 달라진다. 어제의 나무가 오늘은 자취를 감추고, 작은 가게가
있던 곳에 거대한 빌딩이 들어선다. 이렇게 익숙했던 풍경이 순식간에 낯설게 변하는 변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과거의 흔적을 놓치고 만다.

김소라 개인전 <부유하는 조각들> 2025.05.30 – 06.14. 달서아트센터, 대구 전시 전경 / 사진제공. 달서아트센터

김소라 개인전 <부유하는 조각들> 2025.05.30 – 06.14. 달서아트센터, 대구 전시 전경 / 사진제공. 달서아트센터

김소라 작가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도시의 구석구석을 새로운 시선으로 비춘다. 그의
그림은 마치 어둠 속을 비추는 손전등처럼, 일상에 숨어 있던 장면들을 드러낸다. 평범한
골목, 방치된 표지판, 수풀에 묻힌 장난감 등은 그의 화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풍경으로
다시 태어난다. 관객은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장면들 속에서 자신만의 기억을 조용히
떠올리게 된다.

김소라의 예술적 여정은 아주 개인적인 기억에서 시작되었다. 할머니 집, 어린 시절의
놀이터처럼 누구나 마음 한편에 간직하지만, 이제는 사라진 장소들이 그의 초기 작업에 담겨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상실과 그리움,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희미해지는 감정이 함께 스며 있다.

점차 그의 시선은 개인의 추억을 넘어 도시 전체로 확장되었다. 개발로 인해 소외된 공간,
방치된 사물, 그리고 도무지 그곳에서 자랄 것 같지 않은 식물들까지, 이 모든 것들이
김소라의 화면 위에서 현실과 비현실, 익숙함과 낯섦이 교차하는 도시의 또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 낡은 철근이나 오래된 벽의 자국, 무심히 놓인 사물들은 이상하게도 우리에게
친숙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좌] 김소라 개인전 <부유하는 조각들> 2025.05.30 – 06.14. 달서아트센터, 대구 전시 전경 / 사진제공. ©김소라  [우] 김소라 <종착지>, 2025, Oil on canvas, 72.7x90.9cm / 사진제공. 달서아트센터

[좌] 김소라 개인전 <부유하는 조각들> 2025.05.30 – 06.14. 달서아트센터, 대구 전시 전경 / 사진제공. ©김소라 [우] 김소라 <종착지>, 2025, Oil on canvas, 72.7x90.9cm / 사진제공. 달서아트센터

김소라의 회화는 물감이 여러 겹으로 쌓여 만들어진 독특한 질감을 지닌다. 거칠고 두툼한
표면은 오래된 벽을 연상케 하며, 얇게 덧입혀진 색채는 새롭게 쌓이는 감정과 경험을 닮았다.
그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각적인 감상을 넘어, 손끝으로 오래된 벽을 더듬는 듯한
촉각적 경험이 전해진다. 최근에는 이러한 기법이 추상적인 작업으로 확장되어, 다양한
시간의 결이 한 화면에서 공존하는 깊이를 보여준다.

작품을 오래 들여다보면, 자연과 인공, 현실과 환상, 존재와 부재의 경계가 점차 흐려진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사물과 기억의 파편들이 화면 위에서 조용히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방치된 공간과 사물들은 죽은 듯 보이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감정과
이야기가 조용히 피어난다. 김소라의 작업은 단순한 상실의 기록이 아니라, 재생과 생성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좌] 김소라 개인전 <부유하는 조각들> 2025.05.30 – 06.14. 달서아트센터, 대구 전시 전경 / 사진제공. ©김소라  [우] 김소라 <Noticeboard>, 2023, Oil on canvas, 가변설치 / 사진제공. 달서아트센터

[좌] 김소라 개인전 <부유하는 조각들> 2025.05.30 – 06.14. 달서아트센터, 대구 전시 전경 / 사진제공. ©김소라 [우] 김소라 <Noticeboard>, 2023, Oil on canvas, 가변설치 / 사진제공. 달서아트센터

그의 캔버스는 변화하는 도시의 복잡성을 한 화면에 담아내며, 관객이 자신만의 기억과
감정을 투영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 그림 앞에 서면,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골목이나 오랜
친구와 나눈 대화가 불쑥 떠오를지도 모른다. 김소라의 예술은 도시의 변화와 소멸, 그리고
남겨진 흔적이 어우러진 풍경을 통해, 도시가 단순히 사라지고 쌓이는 공간이 아니라, 흔적과
존재가 교차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살아 있는 장(場)임을 일깨워준다.

혹시 오늘, 평소처럼 걷던 길에서 문득 낯선 벽의 자국이나 오래된 표지판, 방치된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면, 그것이 바로 김소라 작가가 우리에게 건네는 작은 신호일지 모른다. 그의
시선을 따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도시의 시간을 천천히 더듬어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우리는 도시의 흔적 위로 흐르는 시간과 존재의 의미를 조용히 되새기며,
각자의 도시 이야기를 다시 써내려 갈 용기를 얻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연진 독립 큐레이터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