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 수녀'의 황홀한 밤 [고두현의 아침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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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2025.06.19 17:37 수정2025.06.19 17:37

격정의 밤
에밀리 디킨슨

격정의 밤- 격정의 밤!
그대와 함께하는
격정의 밤은
우리 최상의 황홀경!

쓸모없네- 바람들-
항구에 정박한 가슴에는-
나침반도 소용없고-
해도도 필요 없어!

에덴에서 노를 젓네-
아- 바다!
난 정박하리라- 오늘 밤-
그대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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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 수녀’의 황홀한 밤 [고두현의 아침 시편]

19세기 미국 여성 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의 사랑시입니다. 평생 독신으로 은둔 생활을 한 시인은 흰옷만 입는다고 해서 ‘뉴잉글랜드의 수녀’로 불리기도 합니다. 56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775편의 시를 썼지만, 생전에는 익명으로 7편만 발표하고 나머지는 서랍 속에 넣어 두었지요.

디킨슨이 쓴 시는 대부분 허무와 죽음, 상실과 이별을 노래한 것입니다. 평범한 것과 초월적인 것을 대비한 시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사랑의 격정과 황홀을 놀라울 정도로 대담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만큼 해석도 다양합니다.

첫 번째는 ‘육체적인 사랑과 감각적인 교합의 갈망’을 노래한 것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격정의 밤(Wild nights)’이라는 제목부터 단순히 거칠다(wild)는 의미를 넘어 감정의 격랑, 육체적 황홀의 의미로 파악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은폐된 에로스 대가’의 격정적인 사랑시로 읽힙니다.

두 번째는 ‘영적인 사랑과 신비주의적 합일’로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디킨슨이 신비주의적 색채를 지닌 시를 많이 썼다는 점에서 이 시를 신과의 영적 결합으로 읽는 것이지요. 이 경우에 ‘그대’는 신이나 초월적인 존재, ‘항구’는 영혼의 안식처, ‘에덴’은 신성한 공간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는 ‘정신적 자유와 해방의 선언’입니다. 이 시를 자기 결정권, 감정의 해방, 여성 주체성의 표현으로 보는 시각인데, 디킨슨이 살았던 19세기 사회의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여성이 자신의 욕망과 자율성을 말하는 건 매우 급진적 행위였기 때문이지요.

이 가운데 어느 관점으로 읽더라도 시적 대상을 향한 시인의 마음이 뜨거운 사랑과 황홀한 기쁨으로 넘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디킨슨의 연애 상대는 누구였을까요.

한 사람은 25세 때 필라델피아의 친구 집에 머무르면서 만난 찰스 워즈워스 목사입니다. 멋진 설교에 인상 좋은 그 목사는 기혼자였습니다. 디킨슨으로서는 혼자 콩닥거리는 짝사랑이었지요.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별다른 진전 없이 그곳을 떠나올 때는 마음이 미어지는 듯했지요. 이후 영혼의 문제를 다룬 편지를 주고받으며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를 꿈꿨으나 결국은 포기해야 했습니다. 연구자들은 두 사람 사이의 영적 교감은 충분히 있었으나 연애 및 육체적 관계는 없었던 것으로 분석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오빠의 아내(올케)이자 오랜 친구인 수잔입니다. 성인이 되고서도 옆집에 살았던 둘은 약 300통의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특별했습니다. 편지엔 감정적이고 열정적인 언어가 담겨 있었지요. ‘수지여, 내 사랑, 내가 무슨 말을 남기든 용서해 주오— 내 마음은 온통 그대로 가득 차 있어요, 그대 아닌 다른 이는 없어…’라는 묘사가 나오고 ‘내 마음의 해변, 내가 닻을 내릴 곳’이라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이 때문에 둘이 단순한 친구, 시누이 관계를 넘어 동성 연인이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습니다. 게다가 수잔은 시의 가장 중요한 독자이자 최초의 독자였습니다. 초기 시 100여 편이 수잔에게 헌정됐습니다. 그래서 많은 평론가들은 둘의 관계가 로맨스 혹은 깊은 사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2018년 개봉한 영화 ‘에밀리 디킨슨의 밤’(Wild Nights with Emily, 2018)은 오늘 소개한 시에서 제목을 차용한 것입니다. 이 영화도 두 사람의 관계를 동성연애로 설정했습니다. 1년 전인 2017년에 나온 영화 ‘조용한 열정’(A Quiet Passion)이 보수적인 시각에서 고독과 내면의 성찰을 다룬 것과 대조적이지요.

물론 당시 여성들 사이에는 친밀한 편지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무조건 연애로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디킨슨의 삶에서는 사랑보다 그 사랑을 표현하고 내면화하는 방식, 시로 승화한 열정과 욕망이 중심축을 이룹니다. 실제 연인이 누구였는지는 모를 수 있어도, 그 사랑의 힘이 1700여 편의 시를 탄생시켰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얼마나 되는지 새삼 돌아보게 됩니다. 아울러 제가 좋아하는 디킨슨의 사랑시 한 편을 곁들입니다.

사랑이란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 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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