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상반기 현재 한국의 벤처캐피털(VC) 시장은 유례없는 혹한기를 겪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유동성 확장과 기술 기반 기업에 대한 투자 열기로 활기를 띠던 시장은 2023년 무렵부터 금리 인상과 글로벌 경기 둔화가 지속되며 급격한 위축 국면에 접어들었다. 기업공개(IPO) 시장의 침체와 인수합병(M&A) 시장 부진으로 투자금 회수가 지연되면서 유동성 확보가 어려워졌고, 이는 다시 유동성공급자(LP)들의 신규 출자를 주저하게 만들어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됐다. 일각에서는 현재 상황을 단순한 ‘혹한기’를 넘어 ‘빙하기’로 규정하며 위기의 심각성을 경고하고 있다. 2025년 상반기에도 이러한 투자 위축은 지속되고 있어 VC 업계와 스타트업 모두 구조적 변화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전략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신규 투자 34% 감소…초기 스타트업 직격탄
2025년 상반기 VC 시장의 위축은 수치로도 분명히 드러난다. 스타트업 분석 플랫폼 ‘혁신의 숲’에 따르면, 2025년 4월 기준 국내 VC의 스타트업 신규 투자액은 3000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4% 감소했다. 3월 투자액도 4094억 원으로 같은 기간 대비 17% 줄었다. 업계에선 2024년 대비 연간 투자 규모가 30% 이상 줄어들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스타트업 생태계의 핵심인 초기 단계 투자가 큰 타격을 입었다. 2025년 1분기 시드 및 시리즈 A 단계의 초기 투자 건수는 181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29% 감소해, 창업 초기 기업의 자금 조달 환경이 더욱 열악해졌음을 보여준다. 이미 일정 수준 이상의 매출이나 기업 가치를 입증한 성장기 스타트업에 자금이 몰리면서 이에 따라 창업 초기 기업의 ‘데스밸리’ 구간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생태계의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투자 분야별로는 인공지능(AI) 분야가 건수 기준 17%, 금액 기준 16%로 전년과 유사한 수준을 유지하며 상대적으로 선방했지만, 이는 곧 비(非) AI 분야 스타트업들이 극심한 투자 가뭄에 시달리고 있음을 반증하는 결과기도 하다.
신규 펀드 결성도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금리 지속과 경기 불확실성 탓에 LP들의 투자 심리가 위축되면서 펀드 조성이 어려워졌다. 2024년 상반기 기준 VC의 투자 여력은 9조8000억 원으로, 2023년 말 대비 7%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2025년 1분기 신규 벤처투자 규모는 약 7000억 원으로 전년 대비 약 35% 줄었다. 이는 2020~2022년 평균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같은 기간 신규 벤처펀드 수도 큰 폭으로 감소하며 시장 내 가용 자금의 풀이 축소됐다.
투자자-스타트업 간 ‘밸류 괴리’ 커진다
투자여력이 존재함에도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 주요 배경은 투자자와 스타트업 간 기업가치 인식 차이와 회수 방안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이에 따라 투자자들은 결정을 미루거나 특정 분야 혹은 후기 단계 기업에만 자금을 집중하는 선별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스타트업 생태계의 다양성을 저해하고, 특정 분야 중심의 포트폴리오 편중으로 장기적 리스크를 키우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5~10년 뒤 한국의 차세대 유니콘 기업 부재라는 시차적 위험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스타트업의 자금 조달 위기다. 특히 초기 기업의 경우 자금 확보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 되면서 운영 자금 고갈로 사업 지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 조사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스타트업의 62%가 자금 부족을 호소했으며, 2025년 상반기에는 상황이 더 악화됐을 가능성이 크다. 이로 인해 기업가치가 하락하고, 기존 투자보다 낮은 밸류에이션으로 자금을 유치하는 ‘다운라운드(Down Round)’ 확산도 우려된다. 이는 기존 투자자의 손실과 함께 스타트업 내부 임직원의 사기 저하로도 이어질 수 있다.
VC, ‘방어 중심’ 투자로 전략 전환
이 같은 위기 속 스타트업은 생존을 위해 비용 절감, 비핵심 사업 축소, 인력 감축 등의 자구책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조치는 단기적으로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핵심 인재의 이탈, 기술 경쟁력 약화, 조직문화 훼손 등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VC 업계도 투자 전략을 보수적으로 조정하고 있다. 신규 투자보다 기존 포트폴리오 기업의 생존과 가치 방어에 집중하며, 후기 단계 기업이나 AI, 딥테크 등 특정 유망 분야에 대한 선별적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이는 단기적 리스크 관리에는 유리하지만, 초기 기업 투자 감소로 인해 장기 수익률 저하와 유니콘 기업 발굴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 LP의 보수적 투자 흐름 속에서 신규 펀드 결성이 지연되거나 규모가 축소되고 있어, LP와의 신뢰 관계 재구축 내지 공고화도 중요한 과제가 됐다.
“위기를 기회로…이젠 내실이 생존 전략”
혹한기를 극복하고 국내 VC 시장과 스타트업 생태계가 재도약하기 위해선 정부, VC, 스타트업 모두의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정부는 정책금융 확대와 규제 완화를 통해 시장 활성화에 나서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2025년 모태펀드 출자 예산을 조기 집행해 13조3000억 원 규모로 국내 벤처투자 시장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4년간 총 2조원 규모로 조성되는 스타트업 코리아 펀드를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딥테크, 바이오, 뷰티 등 미래 전략 산업 중심의 ‘스타트업 코리아 펀드’ 조성도 추진 중이다. 민간 LP 자금 유입을 유도하기 위한 규제 완화 조치도 진행되고 있다.
VC 업계는 수익성 중심의 투자 전략 전환, M&A 및 세컨더리 시장 등 다양한 회수 전략 모색에도 힘쓰고 있다. 다만 국내 M&A 시장의 비활성화는 여전히 회수 전략의 걸림돌이며, 시장 활성화를 위한 생태계 조성 노력이 필요하다.
스타트업은 이번 혹한기를 기회로 삼아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해야 한다. 비용 효율화와 핵심 사업 집중, 글로벌 시장 진출 모색, 사업 모델 혁신, 현금흐름 중심 경영 등의 전략이 요구된다. 정부의 정책자금, R&D 지원사업, 사업화 프로그램 등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전문가들은 2025년 하반기 이후 점진적인 회복을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다. 다만 금리와 글로벌 경제 상황 등 불확실성이 여전한 만큼, 과거 위기 극복 경험에만 기대기보다 창의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해법이 절실하다. 생태계 전반이 협력과 신뢰를 바탕으로 위기를 타개해 나간다면, 이번 혹한기는 한국 벤처 생태계의 성숙과 도약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서보미 법무법인 린 변호사| 법무법인 린의 파트너 변호사로서, 2009년 금융 분야에서 업무를 시작한 이래 그간 국내외 대기업 및 금융회사 사내변호사, 로펌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기업 일반자문에서부터 국내외 인수합병(M&A) 및 합병후통합(Post-Merger Integration), 스타트업 및 벤처투자, 금융, 조인트벤처(JV) 등 기업자문에 대한 다양한 업무수행 경험과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인정보보호, 컴플라이언스 등 TMT 및 의료, 헬스케어 분야에 대한 자문을 활발히 제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