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는 배낭: 어렵게 지킨 돈이 하루 만에 사라지는 이유[김병철의 퇴직연금 개혁 시나리오]5

1 week ago 20

[칼럼니스트=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최 부장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30년을 다닌 회사에서 마지막 인사를 받은 날, 최 부장의 IRP 계좌에는 퇴직연금 3억 원이 한꺼번에 들어왔습니다.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이 사라진 뒤 갑자기 목돈을 마주하니 불안감이 밀려옵니다. 주변에서 “이참에 프랜차이즈 하나 해보시라”고 부추깁니다. 평생 회사 일만 했지 장사는 해본 적 없는 최 부장이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3억 원 중 상당액을 창업 자금으로 쏟아붓습니다. 통계는 이 결말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업종과 기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준비 없이 시작한 생계형 창업이 오래 버티기 어렵다는 사실은 여러 통계가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앞선 네 장에서 우리는 어렵게 모은 돈이 낮은 수익률과 잦은 이직 속에서 어떻게 새어 나가는지를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파도를 무사히 넘기고 은퇴하는 날까지 살아남은 돈에게도, 마지막 함정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왜 월급이 아니라 목돈으로 받는가 — 일시금의 늪 퇴직연금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이 이 돈을 ‘연금’이 아니라 ‘목돈’으로 받습니다. 매달 일정액이 나오는 월급 같은 소득이 아니라, 은퇴하는 그날 한꺼번에 통장에 꽂히는 거액인 셈입니다. 평생 다달이 급여를 관리해본 경험은 있어도, 몇 억 원의 목돈을 30년에 걸쳐 계획적으로 나눠 쓰는 경험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목돈은 자녀 결혼 자금, 빚 상환, 그리고 최 부장처럼 준비 없는 창업으로 순식간에 흩어지곤 합니다. 퇴직금은 왜 아직도 ‘마지막 월급’처럼 보이는가 이 장면을 단순히 개인의 충동이나 무지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한국에서 퇴직금은 오랫동안 ‘연금’이라기보다, 회사를 떠날 때 받는 마지막 보상처럼 여겨졌습니다. 오래 일했으니 한 번에 받는 돈, 인생 2막을 시작할 밑천, 자녀에게 한 번은 보태줘야 할 목돈. 이름은 퇴직연금으로 바뀌었지만, 사람들의 머릿속 이미지는 여전히 퇴직금에 가깝습니다. 제도도 이 인식을 완전히 바꾸지 못했습니다. IRP 계좌로 돈을 옮기게 만들었지만, 그다음 단계에서 “이 돈을 어떻게 평생 소득으로 바꿀 것인가”를 안내하는 길은 충분히 넓지 않습니다. 창구에서는 일시금 수령이 가장 단순하고, 세금도 생각보다 무겁지 않으며, 연금으로 받을 만한 상품은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가장 익숙한 선택을 합니다. 계좌를 깨고, 목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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