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청'들의 영원한 시인 기형도...그 행간과 여백을 채운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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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름이다. 유년 시절엔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며 시장에 간 엄마를 걱정하고(「엄마 걱정」),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며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는 콤플렉스를 조심스레 꺼내놓는다(「질투는 나의 힘」). 그리고 “내 입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며 시를 쓴다는 일의 막중한 책임을 온몸으로 느꼈던(「입 속의 검은 잎」) 그의 문장들은 수많은 독자와 동료 시인들에게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스물아홉 번째 생일을 일주일가량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 그는 여전히 동시대의 시인이다. 1960년생인 그와 동년배인 창작자들은 지금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기형도 또한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작품들은 한국문학사에서 짧지만 분명한 어느 한 자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시인을 꿈꾸는 ‘문청’들에겐 마치 교과서 같은 책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의 창작자들은 기형도의 뒤를 이어 그의 작품과 생애에 또 다른 겹을 쌓아 올리고 있다. 2019년에는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의 출간 30주년을 맞아 88명의 시인들의 헌정작을 묶어낸 『어느 푸른 저녁』이 독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젊은 날에 생애를 마무리했던 만큼, 여전히 많은 이들에겐 젊음과 청년의 이미지로 각인되어있지만, 이렇듯 그의 시는 뒤이은 자들을 통해 풍성한 세계를 확장해가며 또 하나의 고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연극 <기형도 플레이>에서 「질투는 나의 힘」 의 한 장면. / 사진. ⓒ 맨씨어터

연극 <기형도 플레이>에서 「질투는 나의 힘」 의 한 장면. / 사진. ⓒ 맨씨어터

연극 <기형도 플레이>도 그 세계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9명의 극작가가 모인 창작집단 독과 배우 중심의 공연단체 맨씨어터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기형도의 시로부터 출발한 9편의 짧은 희곡(play)들을 하나의 무대 위에서 나란히 선보이는 옴니버스 단막극이다. 9명의 작가가 각자 써 내려간 9개의 이야기는 모두 기형도의 시에서 따온 제목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제목을 빌려온 시로부터 장면이 시작된다.

시를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시 속의 문장들이 언제나 직접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작법에 따라, 그리고 각각의 시가 그려내는 이미지에 따라 시를 활용하는 방법은 제각기 달라진다. 이를테면 「흔해빠진 독서」에서는 동명의 시가 수록된 시집이 주요한 오브제로 등장한다. 세상을 떠난 엄마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두 사람의 대화는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는 시의 첫 문장과 닮아있다. 소리에 뼈가 있다는 학설을 발표한 ‘김교수’가 등장하는 「소리의 뼈」는 두 명의 대학생이 김교수의 수업에 대해 나눈 이야기로 무대화된다. 그 이름도 유명한 「질투의 나의 힘」의 ‘질투’라는 키워드는 자신보다 작가로서 더 성공한 전 애인과 제자를 보고 콤플렉스를 감추지 못하는 중년 문학인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심지어 서울에서 조치원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만난 두 사람의 아련한 모습은 김태형 작가를 통해 긴장감과 스릴 가득한 장면으로 재탄생한다. 이렇듯 9개의 이야기는 기형도의 시를 폭넓게 재해석하며 무대 위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연극 <기형도 플레이>에서 「조치원」 의 한 장면. / 사진. ⓒ 맨씨어터

연극 <기형도 플레이>에서 「조치원」 의 한 장면. / 사진. ⓒ 맨씨어터

이렇게 모인 9개의 조각은 하나의 완성된 공연으로 조립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한 가지 더 있는데, 각각의 장면들은 ‘기형도’라는 키워드를 공유할 뿐 자신만의 세계를 단단히 구축한다. 공연의 시기와 장소, 상황에 따라 마치 블록처럼 조합되며, 9개의 장면이 하나로 연결될 수도, 혹은 원하는 장면들을 자유자재로 이어 붙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치 제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시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편집되어 하나의 시집으로 완성되듯, 이 공연 또한 단순히 장면들의 나열을 넘어 순서와 조합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매력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실제로 올해 5월에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 진행된 공연 기간에는 매 회차마다 서로 다른 장면들이 조합되어 여러 차례 재관람할 때 비로소 9개의 작품을 모두 관람할 수 있는 흥미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장면의 순서와 연결에 따라 같은 작품도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작품이 가진 매력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편집의 미학을 반영하듯 공연이 이루어지는 무대 공간 또한 실제 대도구가 아닌 흰색의 입체적인 구조물들로 채워진다. 배우들은 작품 중간에 구조물을 이리저리 재조합하면서 장면을 이어간다. 하나로 합쳐졌다가 다시 나누어지고, 다시 합쳐지기를 반복하는 대도구들처럼 이야기의 장면들 또한 서로 다른 세계를 비추다가 ‘기형도’라는 하나의 이름 안에 자연스레 재회하며 이어진다.

연극 <기형도 플레이>에서 「흔해빠진 독서」 의 한 장면. / 사진. ⓒ 맨씨어터

연극 <기형도 플레이>에서 「흔해빠진 독서」 의 한 장면. / 사진. ⓒ 맨씨어터

사실 시를 무대화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소설을 각색한 연극은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지만, 시는 각색을 넘어선 그 이상의 작업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보통 시는 작품의 모티프나 영감, 혹은 컨셉을 제시하는 정도로 활용되는 것이 흔한 일이다. 하지만 연극은 사실 시로부터 출발한 장르이다. 서양 연극의 시초라고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비극들은 모두 한 편의 시였다. 셰익스피어 또한 시적 운율을 살린 대사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시적인 연극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연극의 짧은 시간보다 월등히 긴 시간 창작되어 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짧은 기간 동안 구축된 오늘날의 연극 문법은 이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발전해왔다. 이 과정에서 연극의 본연이라 할 수 있는 ‘시’가 연극 안에서 점차 흐릿해진 셈이다.

최근에는 시를 무대의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시인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들의 생애를 담은 이야기 속에 시를 배치하는 방식을 가장 흔하게 취하곤 한다. 특히 윤동주와 백석, 김소월과 같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시인들의 작품을 노랫말 삼아 음악을 붙인 음악극이 눈에 띈다. 물론 시는 작가와 작품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문학의 갈래 중 하나라는 점에서, 시인과 완전히 떼어놓은 채 시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나 윤동주와 같이 자신을 둘러싼 시대적 배경을 시에 적극적으로 투영해낸 시인의 작품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자칫 시의 언어를 시인‘만’의 이야기로 국한시키며 시와 관객 사이의 거리를 분명히 한다는 한계를 갖는다. 시인의 삶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서 각자의 삶의 맥락에서 시를 생각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다.

연극 <기형도 플레이>에서 「소리의 뼈」 의 한 장면. / 사진. ⓒ 맨씨어터

연극 <기형도 플레이>에서 「소리의 뼈」 의 한 장면. / 사진. ⓒ 맨씨어터

이러한 점에서 <기형도 플레이>가 보여주는 방식은 시의 행간과 여백에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과 감정을 더욱 적극적으로 투영하며 그 거리를 좁혀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실제로 자신의 일상에서 기형도의 시를 마주하는 순간에서부터, 기형도가 보여준 질투와 수치, 두려움이라는 감정 또한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극장 안에 있는 모두에게 상기시킨다. 여기에 시 속에 존재하는 상황과 공간에 다양한 인간군상을 배치한 이야기를 통해 시 속의 이야기가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할 법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하며 시를 관객과 더욱 친밀하게 만든다. 무대에 오르며 문자라는 형태를 뛰어넘은 시는 실재하는 공간과 사람을 통해 생동감을 얻고, 관객들의 삶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다. <기형도 플레이>는 그렇게 시가 우리의 삶과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말을 건네는 듯하다.

연극은 문학과 분명히 구별되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 호흡하는 예술 중 하나이다. 그래서 연극의 시작점이 되는 ’희곡’은 연극이자 문학이라는 두 가지의 영역 사이에 중첩되어 있으며, 극작가들 또한 그 사이에서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영역을 확장해나간다. 특히 최근에는 젊은 극작가들을 중심으로 공연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희곡집을 출간하며 연극에 국한되지 않고 스스로의 자리를 만들어간다.

<기형도 플레이>를 함께 집필한 창작집단 독은 연극인이자 문학인인 극작가의 이중적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들이다. 구성원 중 일부는 연출가이자 극작가로 활동하며 연극에 더욱 힘을 싣고, 또 다른 누군가는 시인과 서점주인, 출판사 사장 등을 겸하며 문학인으로의 정체성을 다져나간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의 단일한 정체성으로 수렴되기보다는 창작집단 독이라는 단체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으로 이어진다. 그들이 각자의 색깔을 뚜렷하게 지켜내는 9개의 연작을 보여줄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시라는 문학의 행간과 여백을 연극을 통해 채워내는 시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연극 <기형도 플레이>에서 「흔해빠진 독서」 의 한 장면. / 사진. ⓒ 맨씨어터

연극 <기형도 플레이>에서 「흔해빠진 독서」 의 한 장면. / 사진. ⓒ 맨씨어터

<기형도 플레이>는 그 시작이 시(인)의 이야기인 만큼, 문학계와의 적극적인 협업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기형도 시인의 고향인 광명시가 주최한 35주기 추모행사에서 기념공연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창작집단 독의 구성원 중 한 명이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발간된 희곡집(『팬데믹 플레이』)으로도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지난 9월 16일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의 문학주간을 통해 <기형도 플레이>의 일부 장면이 입체낭독극이라는 형태로 대학로예술극장에서 시민들에게 선보여지기도 했다.

앞으로 시는 어떻게 무대에 오르게 될까. 문학과 연극을 넘나드는 경계의 극작가들이 자신의 이중적 위치가 가진 장점을 적극적으로 발휘하며 더 다양한 가능성을 제안하는 작업이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시의 문장들을 단순히 인용하는 듯한 방식을 넘어 그 행간까지도 무대화할 때, 시와 연극은 서로는 물론 관객들과도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박진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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