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초유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신뢰가 또 한 번 벼랑 끝에 내몰렸다. 이번 6·3 지방선거에서 용지가 부족한 투표소가 대부분 보수 강세인 서울 동남권에 몰리면서 일부 시민이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항의하는 등 파장이 커졌다. 국민의힘은 선관위 해체까지 주장했다. 더불어민주당도 부정선거 음모론에 기름을 부었다며 책임자 추궁에 나섰다.
4일 선관위 등에 따르면 이번 6·3 지방선거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일부 유권자가 대기하거나 투표를 포기한 지역은 16곳이다. 서울에서는 송파구 11곳, 강남구 2곳, 광진구 1곳 등 총 14곳에서 용지가 부족했다. 또 인천 연수구 투표소 2곳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에선 마감 시간(오후 6시)까지 대기표를 받은 유권자에 한해 밤 10시까지 투표가 이뤄지는 이례적 상황이 벌어졌다.
투표용지가 일찍 동이 난 건 선관위가 지역별 수요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문제가 발생한 투표소의 경우 선관위는 본투표일 용지를 전체 선거인의 50% 분량만 인쇄했다. 당초 투표용지 인쇄 하한 기준은 전체 선거인의 60%인데 이번 선거에서 일부 시·군·구 선관위가 이를 50%로 낮추면서 화를 키웠다. 선관위는 이날 입장문을 내고 “투표지 부족 사태 원인 파악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위해 외부 전문가 위주로 구성한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운영한다”고 밝혔다.
선관위가 논란의 중심에 선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대선 사전투표 때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사전투표사무원이 남편 대신 대리투표하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서울 신촌 사전투표소에선 유권자들이 투표용지 수령 후 투표소 밖에서 대기하며 ‘투표용지 반출’ 논란이 일었다. 2024년 총선 때는 재외선거율을 부풀려 직원 22명의 해외 출장 예산을 늘렸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2022년 20대 대선 사전투표 당시 코로나19 확진자 기표 용지를 선거사무원이 플라스틱 바구니로 운반하는 ‘소쿠리 투표’ 논란도 빚었다. 2023년 감사원 조사에선 친인척 특혜 채용과 금품 비리가 만연한 사실이 드러났다.
끊이지 않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선관위가 좀처럼 바뀌지 않는 배경에는 독특한 위상이 있다. 선관위는 헌법기관이라는 독립적 지위를 지닌다. 외부 감사나 견제를 받기 어려운 구조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선거를 헌법이 아니라 법률에 근거해 관리한다. 비리가 발생하면 수사나 의회의 통제를 받도록 안전장치를 둔다. 한국에선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겪은 뒤 선거 관리의 독립성을 헌법으로 보장하는 길을 택했고, 그 결과 외부 견제의 사각지대가 형성됐다.
정부도 선관위 비판에 가세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선거 관리에 납득하기 쉽지 않은 허점이 발생한 점에 대해 매우 큰 유감”이라며 “관계기관은 행정부가 가진 권한과 책임을 모두 사용해 문제 발생 이유를 명확히 밝히고, 책임질 것이 있다면 명확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최해련/한재영 기자 haery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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