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은 나름 잔혹했던 계절로 기억할 것 같다. 6월 말부터 타는 듯 더워, 단골 카페의 매니저에게 푸념이랍시고 한 마디 던졌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와, 지금부터 이렇게 더우면 한여름에 어떻게 버틴대요? 사실 그 한 여름도 지났고, 현재 8월이 이틀 반밖에 안 남았는데도 더위가 사그라들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대략 광복절을 넘기면 습도라도 조금 잦아드는데 올해는 아직까지도 그런 느낌이 없다.
그런 탓일까? 올여름 유난히 과일이 맛있지 않았다. 이 계절이 잔혹했다고 생각하는 진짜 이유인데, 주변에 하소연을 좀 해보았지만 제대로 된 공감은 얻어내지 못했다.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대답을 주로 들었는데, 확실히 내 느낌은 달랐다. 참외도 무를 씹는 것 같았고, ‘딱복’, 즉 딱딱한 복숭아는 정말이지 소고기와 함께 국을 끓여 먹고 싶었던 게 대부분이었다.
솔직히 과일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여름의 채소인 오이조차 쓰고 맛이 없었다. 엄청나게 맛있어 보이는 광고를 보고 산 오이소박이가 써서 절반 이상 버려야만 했다. 어머니의 여름 반찬 가운데 가장 좋아해 여름이면 부지런히 해 먹는 노각(늙은 오이) 무침도 부푼 마음으로 만들었다가 역시 눈물을 머금고 버렸다. 정말 눈물이 날 만큼 썼다.
이처럼 의구심이 들었던 가운데 천도를 먹어보자 확신이 들었다. 올여름은 정말 아니구나. 여름은 물론 사시사철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라고 꼽는 천도, 단맛이 없지 않지만, 균형을 잡아주는 신맛을 확실하게 갖춘 과일. 그렇기에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크럼블이나 갈레트 같은, 밀가루와 버터 반죽을 더해 굽는 디저트에도 완벽하게 어울린다. 더군다나 저렴해 내게는 여름을 버티게 해 주는 은인 같은 과일이다.
갈수록 우리의 과일이 생식에 초점을 맞춰 단맛만 강조하는 외통수로 나아가는 현실 속에서 정말 꿋꿋하게도 신맛을 갖췄기에 사랑하는데, 올여름의 천도는 정말 맛있지 않았다. 그 신맛이라는 것도 단맛이 제대로 장단을 맞춰줘야 즐거운데 전혀 그렇지 않아 그저 시금털털할 뿐이었다. 그나마 8월 중순 ‘바로 이 맛이다!’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기뻐하기도 잠시, 채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도로 맛이 없어졌다.
다수가 최고의 여름 과일로 복숭아를 꼽는 현실 속에서 천도는 그저 이등 과일 취급을 받을 뿐이라 나처럼 맛이 예년보다 못하다고 슬퍼하는 사람도 적다. 하지만 이름을 찬찬히 뜯어보시라. 한자로는 ‘天桃’, 영어로도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신화 속 신의 음료’라는 ‘넥타르(Nectar)’에서 파생된 과일이 바로 천도복숭아다. 신의 과일이라는 의미인데 이렇게 홀대해도 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게 복잡하다 못해 한편 비참한 심정으로 엘리엇 호지킨(1905~1987, 영국)의 ‘흰 종이에 싸인 세 개의 천도복숭아(1957)’를 본다. 이 그림을 보고 바로 입에 군침이 돌지 않았다면 당신은 매정한 사람이다.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기후 변화로 정말 해가 다르도록 과장 없이 잔혹해지는 여름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안기는 천도복숭아처럼 자잘한 낭만을 모르는 냉혈한이다.
작가의 솜씨 덕분에 어떻게 그렸더라도 천도복숭아는 맛있게 보였겠지만 둘러싼 종이의 역할을 절대 간과할 수 없다. 일단 과일의 세계 자체만을 놓고 보더라도 종이에 쌌다는 건 나름 고급 대접을 한다는 의미다. 과연 이 그림이 그려진 1950년대의 영국에서는 천도복숭아도 복숭아처럼 귀하게 대접해 종이에 싸서 팔았을까? 기억하는 한 천도복숭아가 종이에 싸여 팔리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림 자체만 놓고 보았을 때도 종이는 천도복숭아를 시각적으로 더 돋보이게 해준다. 일단 작품 속에서 시각적 경계를 설정해 줌으로써 과일 자체에 더 집중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는 한편 둥글고 매끄러운 천도복숭아의 형태 및 질감에 대조를 이루는 사선과 종이의 주름으로 긴장감을 잃지 않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가운데 놓인 것처럼 일부를 가려 신비함도 연출해 준다.
그렇기에 주홍색과 옅은 오렌지색을 골고루 보여주는 맨 왼쪽의 천도가 가장 맛있어 보이지만,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가운데 것을 집어들 것 같다. 나머지 둘과 달리 아직 보여주지 않은 맛이 남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 글이 올라올 때쯤이면 천도의 철도 완전히 막을 내리겠지만, 이 작품을 컴퓨터 배경화면에 저장해 놓고 내년 여름을 기다리겠다.
이용재 음식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