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아해의 붉은 지붕 파도, 킹스랜딩을 걷다[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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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스플리트

‘아드리아해의 진주’로 불리는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아드리아해는 이탈리아 동쪽 발칸반도 사이에 있는 좁고 긴 내해(內海)다. 파도가 거의 없어 호수처럼 보인다.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이 번성하고, 중세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상 무역로가 되었던 문명의 교차로. HBO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킹스랜딩의 촬영지, 로마 황제가 슬기로운 은퇴생활 장소로 택했던 달마시아(Dalmatia) 해안도시로 떠나보았다.

● 킹스랜딩이 눈 앞에

크로아티아 남부 달마시아 지역에는 두브로브니크, 스플리트, 자다르 같은 고대 로마부터 중세에도 번성했던 유서깊은 해안도시들이 많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101마리 달마시안’에 등장하는 점박이 개 품종인 ‘달마시안’의 고향이 바로 이곳이다.

크로아티아 아드리아해의 크리스탈 블루 해변에 대조되는 붉은색 지붕의 성곽도시 두브로브니크. 19세기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웠던 라구사 공화국의 수도다.

크로아티아 아드리아해의 크리스탈 블루 해변에 대조되는 붉은색 지붕의 성곽도시 두브로브니크. 19세기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웠던 라구사 공화국의 수도다.
두브로브니크의 2km 남짓한 성벽을 한바퀴 걷고, 케이블카를 타고 스르지산(778m)에 올라가는 이유는 딱 한가지다. ‘붉은 지붕’이 파도를 보기 위해서다. 특히 크리스탈 블루와 에머랄드 빛으로 빛나는 아드리아해와 어우러지는 붉은 지붕의 대비는 독보적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두브로브니크는 붉은 지붕을 철저히 보존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두브로브니크의 올드타운 뒷골목을 걷다보면 미국 HBO드라마 ‘왕좌의 게임’ 속 ‘킹스랜딩’이 생생하게 눈 앞에 펼쳐지는 느낌을 받는다. 현지 가이드가 가장 먼저 데려간 곳이 성벽의 서쪽 문인 필레 게이트 아래 항구. 드라마 속에서 ‘블랙워터 만(Black Water Bay)’으로 나오는 필레만이다. 오른쪽과 왼쪽 양쪽에는 높은 성벽과 계단이 있고, 라니스터, 스타크 가문의 사람들을 실은 배가 드나들고 해전이 펼쳐지던 장면이 눈 앞에 선하다.

드라마 왕좌의게임의 촬영지였던 두브로브니크 필레만과 로브리예낙 요새.

드라마 왕좌의게임의 촬영지였던 두브로브니크 필레만과 로브리예낙 요새.
필레만의 서쪽에는 37m 높이의 거대한 절벽 위에 로브리예낙 요새가 우뚝 솟아 있다. ‘왕좌의 게임’에서는 ‘붉은 성’으로 나왔던 성채다. 필레만의 동쪽에는 포트 보카르라는 또 다른 요새가 있다. 절벽과 성벽, 그리고 붉은 지붕이 어우러진 필레만의 경치는 절경이다. 성의 다른쪽 올드포트 항구에서 배를 타면 로크룸 섬에 도착한다. 왕좌의 게임 속 ‘철 왕좌’가 실제로 전시돼 있어 관광객들의 인증샷 명소다.

올드타운 골목을 걷다가 파리 오페라극장처럼 우아한 계단이 나타났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계단. 성이그나시우스 교회 앞 ‘예수회 계단’은 왕좌의게임에서 가장 충격적 명장면이 촬영된 곳이다. 세르세이 라니스터(레나 헤디)가 머리를 깎이고, 벌거벗긴채 군중의 조롱 속에 걸어갔던 ‘수치의 행진’이다. 극중 최고 권력자의 딸이자 왕국의 왕비였던 세르세이 라니스터. 그녀가 권력을 잃고 셉트 성당에서 붉은 성까지 ‘참회의 행진’을 한다. 킹스랜딩 시민들은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Shame!”을 외치며 손가락질을 하고, 음식물을 던진다.

이 장면을 촬영할 당시 레나 헤디는 ‘몸 대역’을 썼다. 1000명의 오디션 경쟁을 뚫고 대역에 선정됐던 레베카 반 클리브가 나체로 사흘간 같은 장면을 촬영했다. 특수 효과 전문가들은 레나 헤디의 얼굴을 레베카의 신체에 디지털로 입혀 놓았다. 세르세이의 ‘수치의 행진’ 장면은 실제로 1486년 6월 에드워드 4세의 정부(情婦)였던 제인 쇼라는 인물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간음죄와 마녀 혐의로 체포된 그녀는 반투명한 흰 튜닉만 입고 세인트폴 대성당부터 런던의 거리를 행진해야 했다.

두브로브니크 성벽에서 내려다본 올드타운.

두브로브니크 성벽에서 내려다본 올드타운.
올드타운에 있는 프란체스코 수도원에는 수도사들이 연금술을 연구하며 제조했던 불로불사 영약에 대한 기록이 전시돼 있다. 수도원 내에는 1317년에 설립된 약국도 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약국(1221년)이 더 오래됐지만, 이 약국은 현재도 운영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이다. 수도사들의 200년 된 레시피로 허브와 오일을 활용해 만든 장미 크림이 유명하다.

● 나의 스플리트는 어디인가

종탑에서 내려다본 스플리트 해변과 도시풍경.

종탑에서 내려다본 스플리트 해변과 도시풍경.
두브로브니크에서 좀더 북쪽에 있는 스플리트(Split)는 1700년 전 로마 황제가 은퇴지로 선택한 해안 휴양도시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인 황제 시대라 불리던 3세기 말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로마 제국을 구해낸 통치자였다. 당시 로마는 정치적 암살, 군부 쿠데타, 외부의 야만족 침입으로 인해 거의 붕괴 직전까지 몰려 있었다. 그는 로마제국을 4개 지역으로 나눠 다스리는 사분통치제(Tetrarchia)를 만들었고, 행정 개혁과 세금제도 정비로 로마를 재건했다.

그런데 305년 5월. 황제는 예상 밖의 선택을 했다. 그는 은퇴했다. 로마 제국 건국 이후 몇 세기 동안 암살당하거나, 폐위당하거나, 추방당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권력을 내려놓은 첫 번째 황제였다. 그는 은퇴 전 고향 근처인 스플리트에 10년에 걸쳐 궁전을 지었다. 궁전의 규모는 약 3만8000㎡. 축구장 약 5개 정도의 면적이다.

디오클레아누스 궁전의 페리스타일 광장

디오클레아누스 궁전의 페리스타일 광장
궁전의 중심에는 페리스타일(Peristyle)이라는 거대한 열주가 있는 안뜰이 있다. 기둥 아래에는 검은색 화강암 스핑크스가 놓여져 있다. 약 3500년 전인 이집트 투트모스 3세 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스핑크스다. 궁전에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12개의 스핑크스가 있었는데 현재는 3개의 스핑크스가 남아 있다. 대부분 얼굴이 훼손돼 있지만 페리스타일 광장의 스핑크스는 가장 온전한 상태의 얼굴을 보여준다. 스핑크스 맞은 편 카페의 이름은 ‘룩소르(LVXOR)’. 비엔나식 크림 커피가 유명하다. 카페는 손님들을 위해 페리스타일의 돌 계단 위에 쿠션을 펼쳐놓는다. 돌기둥에 등을 기대고, 발은 고대 로마의 광장에 내려놓고, 스핑크스를 마주보며 따뜻한 커피를 마신다. 로마 황제가 된 기분이다.

페리스타일을 지나면 돔모양의 지붕을 가진 연결 통로가 나온다. 황제가 손님을 만나는 알현실로 쓰이던 공간이다. 높이 17미터, 지름 12미터의 원형홀 정상에는 둥그런 구멍인 ‘오큘러스(oculus)’가 뚫려 있다. 햇빛이 들어오는 이 구멍은 최고의 음향효과도 만들어낸다. ‘클라파(Klapa)’라고 부르는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지역의 전통 민속음악이 상설공연되는데, 남성 4명이 반주없이 소리만으로 실크처럼 섬세한 화음을 만들어낸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두브로브니크가 ‘킹스랜딩’의 무대였다면, 스플리트는 데너리스 타르가리엔이 군대와 용을 끌고 왔던 ‘미린’이라는 또다른 세계관의 촬영지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밑에는 높이 10미터, 길이 50미터가 넘는 지하공간이 있다. 전체 궁전의 약 8분의 1에 이르는 거대한 공간이다. ‘왕좌의 게임’에서 대너리스가 키우던 용 세 마리가 갇혀 있던 ‘용의 던전(Dungeon)’으로 나왔던 공간이다. 현지 해설 가이드는 “중세 이후 1000년간 지하공간에 쌓인 배설물들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시대에 석조로 지어진 지하공간이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스플리트 해변 산책로인 리바 프롬나드.

스플리트 해변 산책로인 리바 프롬나드.
궁전을 나와 바다쪽으로 나가보면 요트가 정박해 있는 항구가 나온다. 해변에는 길이 500미터, 폭 40미터 정도의 직선거리인 ‘리바(Riva) 프롬나드’가 이어진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해질녘이면 몰려나와 이웃과 친구를 만나고 커피를 마신다. 매일 저녁 일상의 의식처럼 반복되는 이런 저녁 산책을 ‘코르조(Korzo)’라고 부른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스플릿에서 6년간의 은퇴생활 동안 채소를 기르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1700년 전 황제의 ‘은퇴레시피’는 현대인에게도 깊은 영감을 준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의 스플리트는 어디일까? 나는 은퇴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 크로아티아 전통요리 ‘페카’

지중해 연안의 크로아티아는 신선한 올리브와 치즈, 와인을 곁들인 음식 문화가 발달했다. 두브로브니크 올드타운에 있는 ‘로컬 페카(Lacal Peka)’에서는 크로아티아 전통요리를 맛볼 수 있다. 철제 뚜껑이 있는 용기인 ‘페카’ 안에 송아지 고기와 감자, 당근, 양파, 로즈마리, 올리브유, 와인, 파프리카, 토마토 등을 넣고 숯불로 4∼5시간 익히면 안에서 각종 재료가 향이 어우러진 요리가 완성된다. 한국의 뚝배기 찜과 비슷한 맛이라고할까. 특히 마랑군 레스토랑에서 맛본 문어 페카는 입 안에서 살살 녹는 감칠맛이 났다. 식전에 나오는 ‘프로슈토’는 돼지 넓적다리를 아드리아해의 바람과 햇살을 받으며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쳐 천천히 숙성시켜 깊이 있는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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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크로아티아=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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