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왜 항상 바쁠까?
어린이대공원으로 소풍을 가는 날 아침, 한껏 들뜬 마음으로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장소에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설레는 마음을 부여잡고 발을 동동거렸다. 하하 호호 뭐가 그리 즐거웠는지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웃으며 공원에 도착했다.
명색이 우리 반 부반장으로 전날 친구들의 입장료를 모두 걷어 챙겨오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던 터였다. 가방을 열기도 전, 왠지 모르게 뒤통수가 서늘하고 식은땀이 났다. 우리 반 입장료를 걷은 동전 주머니는 가방 안에 없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중 전화기로 달려갔다. 피곤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엄마는 울먹이며 다급히 쏟아내는 내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계셨다. 반 친구들 입장료가 담겨있는 동전 주머니를 서울대공원으로 가져다주실 수 있는지 부탁하였지만, 엄마는 "스스로 해결해 보는 게 좋겠다" 하시며 전화를 끊으셨다. 순간,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단언컨대 ‘우리 엄마는 새엄마가 맞다!’라는 생각뿐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매몰차게 끊을 수가 있는지 다시 전화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엄마는 오지 않으실 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 부모님은 항상 바쁘셨다. 비가 오는 날 우산을 가지고 학교 앞 정문에서 기다리시는 친구들의 엄마를 보면 부러웠다. 지금은 엄마와 앉아 '그때 친구들이 돈을 조금씩 걷어 입장료를 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라며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엄마가 한없이 밉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아이의 미움을 받는 그 엄마가 되었다. 어린이집으로, 유치원으로, 학교로 아이는 성장하지만, 아침저녁으로 매번 달음질치며 허둥지둥하는 엄마의 모습은 성장을 멈춘 뾰족한 선인장 같다. "엄마는 왜 항상 늦게 와?" 아이의 질문은 짧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단순하지 않다. 서운함, 외로움, 불안, 그리고 아주 작고 조심스러운 이해가 담긴 눈빛이다.
그림책이 전하는 다정한 진심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아이를 돌봐주시던 엄마가 아이와 한 그림책에 관해 이야기하느라 신이 나 있었다. 바쁜 엄마를 대신해 아이를 돌봐주는 낯선 누군가가 나타나는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아이가 잠든 후에도 엄마는 그 그림책 이야기에 여념이 없으셨다. 내 엄마의 이야기, 엄마가 된 나의 이야기였다. 아이에게 미안한 감정, 엄마에게 서운한 마음을 그림책을 통해 함께 들여다보고 승화시킬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림책을 보다 보면, 엄마와 아빠가 아닌 ‘다른 양육자’가 등장하는 이야기가 점점 많아졌음을 실감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 또는 이웃의 어른들까지. 그들이 아이들과 겪는 좌충우돌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났다가 울음이 났다가 감정이 요동친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과 실랑이를 벌이며 어쩔 줄 몰라 종종걸음으로 쫓아가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때로는 돌봄을 받아야 할 아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이는 부모 이외도 자신을 지켜봐 주는 어른이 있다는 사실에서 자존감과 안정감을 얻는다. 여러 어른을 통해 다양한 관계를 경험하며, 아이는 더 유연하고 풍부한 감정을 배우게 된다. 조금 느리지만 다정한 돌봄은 아이에게 기다림과 여유, 세대 간의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게 해준다.
엄마, 아빠의 이야기가 아닌 나를 사랑해 주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며 아이는 점차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세상의 사랑은 단 하나의 형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다정한 손길과 느린 걸음도 아이에게는 충분한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림책 속 '또 다른 가족'의 이야기는 우리가 놓치고 지나치는 돌봄의 순간들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 한구석에 남은 이야기들은 언젠가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자기 안의 단단한 기억으로 피어날 것이다.
박효진 길리북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