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의 끓어오르는 풍경을 그린 페드로 피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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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피가리(1861-1938)

우루과이라는 나라 이름을 들으면 세계무역기구 설립을 위한 다자간 무역 협상의 시작이었던 ‘우루과이 라운드’(1986)라든가 월드컵 축구 2회 우승(1930·1950)에 빛나는 남미의 축구 강호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지도를 보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위치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1821년에 포르투갈-브라질연방에 합병된 후 1822년 브라질 독립과 함께 브라질령이 되는가 하면, 다시 1825년에는 아르헨티나의 지원으로 대(對)브라질 독립전쟁에 승리해 1828년 완전 독립을 이루었다.

페드로 피가리는 우루과이에서 일상의 삶을 작품에 담아내는 것을 강조한 초기 모더니스트 화가다. 나이가 들어서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작품에서 어린 시절에 관찰한 지역 관습을 그려 고향의 본질을 포착하고자 했다. 그는 멕시코의 디에고 리베라, 브라질의 타르실라 두 아마라우와 같은 이들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 예술계에서 소위 정체성 혁명을 일으켰다.

페드로 피가리 (1861-1938) / 사진출처. © National Museum of Visual Arts

페드로 피가리 (1861-1938) / 사진출처. © National Museum of Visual Arts

음악성을 통한 아프리카 뿌리의 탐구

피가리가 20년대부터 30년대까지 그린 몇 점의 <칸돔베>를 보자. 칸돔베란 무엇인가. 아프리카 노예들로부터 유입된 우루과이의 음악이자 춤이다. 사전에는 심지어 ‘남녀 니그로의 상스러운 춤, 또는 그 춤에 쓰이는 큰북의 일종’이라 되어 있다. 본래 음악으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변에서 추던 축제에 쓰였는데 탱고가 사교의 중심부에 침투한 데 반해 조잡하고 속되다는 인식으로 이 음악은 점차 쇠퇴했다.

그림에서 인물들의 유달리 길어 보이는 팔은 흐느적거리듯 물결치는 가운데 얼굴은 대부분 뭉개져 있더라도 입만은 몰아 상태를 입증이라도 하듯 붉게 벌어져 있다. 과감한 색채대비와 함께 타악기 주자의 모습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어 리듬감의 상상을 돕는다. 남미에서도 백인 위주의 이민정책으로 악명높은 세 국가(칠레, 아르헨티나와 함께) 중 하나인 우루과이에서 피가리가 그려 나간 아프리카계 후손들에 대한 시각적 연대기는 노예제도가 유산으로 남긴 고통을 잊지 않는다.

페드로 피가리 <카니발의 칸돔베> (1932)

페드로 피가리 <카니발의 칸돔베> (1932)

페드로 피가리 <칸돔베> (1921)

페드로 피가리 <칸돔베> (1921)

인생 후반기에 시작된 화가 이력

1861년 수도 몬테비데오의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예술에 관심을 보였지만, 화가로 인정받기 전 삶의 대부분은 변호사로서, 또 정치인, 문학가 이력으로 채워졌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변호인으로서 그의 지위는 그를 많은 사회적 이슈에 노출했다. 법학 학위를 받은 같은 해에 그는 이탈리아 화가인 고도프레도 솜마빌라의 지도를 받았고, 결혼한 후 프랑스로 갔는데 그곳에서 후기 인상주의에 노출되었다. 우루과이로 돌아온 그는 저널리즘, 법률,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미술교육기관(Escuela de Bellas Artes)의 창립을 촉진했다.

피가리는 60세가 된 1921년에야 완전히 그림에 전념했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 제작 연도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국한된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사했고, 경력 초기에 채택했던 이탈리아 스타일을 버렸다. 그가 전념한 것은 우루과이 풍경, 가우초 생활, 축제, 지역 흑인 커뮤니티의 카니발 등의 재구성이었다. 1925년 파리로 이주했을 때 그는 기억을 바탕으로 이 주제를 계속 그렸고, 이를 통해 화가로서 도약했다. 전시회를 열었고 저명한 프랑스 비평가들이 주목했다. 1933년에 우루과이로 돌아와 5년 후에 사망했다.

끓어오르는 생명력

피가리는 남미 예술계 구성원들이 유럽의 스타일이 아닌 자신들의 스타일로 정체성 찾기에 골몰하던 시기에 그림을 그렸다. 파리에서 모더니스트 서클을 알게 된 라틴 아메리카 예술가들은 곧 그곳 비평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는데, 이 작품들은 그들의 눈에 토착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 예술가들의 존재는 사실 유럽인들에게 매우 환영받는 이국주의를 상징했다.

피가리에 따르면 유럽 그림은 “순수한 조형적 가치에 대한 신념과 환상”을 강조했다. 그는 “유럽 문명이 조화롭고 단순한 삶을 상실한 반면, 남미는 기원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제공했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주어진 순간의 본질과 느낌을 포착하려는 의도로 대상이 지닌 에너지와 생명력을 강조해 그림을 그렸다. 그가 구현해내는 회화적 특징은 움직임이 느껴지는 표현주의적 붓놀림이다. 인물의 얼굴에서 의도적으로 정확성을 제거하고 모든 요소가 같은 상징적 평면에 있다는 듯 장면 전체에 강한 집단의식을 부여한다.

아프리카계 우루과이 문화는 이 지역으로 강제 이주하고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의 기억을 대표하며, 식민지 사회가 제안한 인종주의적 이상에 대항하여 공동체를 통합하고 정체성을 구축하는 중요한 문화적 저항을 구성한다. 피가리가 그려내는 인물들의 몸짓은 움직임이 강조된다. 윤곽선이 강하고 색상 조합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가운데 하늘, 나무, 땅 등 배경 모든 것이 끓어오른다.

페드로 피가리 <칸돔베> (1925)

페드로 피가리 <칸돔베> (1925)

일상생활로 표현된 존엄

상파울루 미술관에서 피가리를 조명하는 특별전이 열렸을 때 브라질 미술계가 강조한 것은 피가리가 “포르티나리처럼 일하는 흑인이나 디 카발칸티처럼 관능적인 포즈를 취한 흑인을 그리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사실 우루과이는 브라질처럼 아프리카 문화가 광범위하게 노출되지는 않은 곳이다. 축제, 장례식과 같은 그들의 의례를 주제로 한 피가리의 작품들은 그가 흑인 차별에서 비롯된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노예의 삶에 대한 표현은 자유주의적 소명을 가진 변호사이자 인권 옹호자인 피가리의 성정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는 젊은 날부터 인종 차별에 맞서 싸웠고 세계관이 성숙한 시기인 60대에 그림에 전념하기 시작했기에 이러한 신념이라 할 만한 것이 온전히 캔버스에 담겼던 것이다.

그는 <시장 안뜰>에서 배경에 아케이드와 식민지 시대 교회가 있는 전형적인 남미 광장을 묘사한다. 광장은 활동으로 가득 차 있으며, 다수의 인물이 상품을 사고팔거나 사적인 사교를 나누고 있다. 인상주의와 유사한 느슨한 제스처 스타일로 표현된 피가리의 인물은 식별할 수 없다. 다채로운 튜닉은 캔버스 표면에 생생한 패턴을 만든다. 그의 목표는 인물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시장의 움직임과 생기 가득한 분위기 포착을 목표로 했다. 길 잃은 개들이 상인들 주변을 놀고 뛰어다니고, 다채로운 과일과 채소 더미가 담요 위에 쌓여 있으며,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긴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이 가격을 흥정한다. 인물들 뒤에는 파스텔 색상의 건물이 여러 채 광장 위로 솟아 있어 막힌 공간감을 조성한다.

페드로 피가리 <시장 안뜰> (1935)

페드로 피가리 <시장 안뜰> (1935)

피가리가 인상파 기법의 특정 측면(느슨하게 보이는 붓놀림, 대담한 색상, 작업에서 세부 묘사보다는 리듬과 움직임에 대한 강조)을 사용하기로 한 것은 아마도 1913년 파리를 방문하여 모네, 르누아르, 시슬리, 피사로, 드가, 세잔의 작품이 전시된 인상파 그림 전시회에 참석한 데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가들과 달리 피가리는 삶에서 관찰한 현대의 여유로운 장면을 그리지 않았다. 피가리의 장면은 사라져 가는 관습에 대한 향수 어린 상상이었다. 그는 인상파 기법을 기억의 흐릿한 가장자리, 현재의 욕망에 따라 재구성된 과거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다시 사용했다.

그가 다룬 다른 주제는 결혼식과 장례식, 그리고 노예제도에 관한 주요 장면이다. 우루과이에서는 1842년에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는데, 이는 피가리가 태어나기 19년 전이었다. 백인의 장례식과는 다른 장례 의식을 보여주는 그림에서 사망 시에도 흑인을 분리시킨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흑인의 장례식은 야외에서 음악과 함께 이루어졌다. 호화롭고 부유한 집에서 신혼여행을 준비하며 키스하는 흑인 부부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흑인들이 우아하게 장식된 집에서 백인 주인을 섬기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피가리는 슬픔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인간 집단의 상실감을 쓸쓸하게 그린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지 않은, 더욱 공동체적이었던 시절을 기린다.

페드로 피가리 <허니문> (연도 미상)

페드로 피가리 <허니문> (연도 미상)

페드로 피가리 <사고> (1930)

페드로 피가리 <사고> (1930)

페드로 피가리 <장례> (1924)

페드로 피가리 <장례> (1924)

기억의 빛

피가리는 주로 기억에 의존하여 그림을 그렸다. 이는 그의 작품에 훨씬 더 개인적인 느낌을 준다. 빠른 획은 움직임과 꿈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사실과 기록 사이에는 시간적 불일치가 있을 수 있으나 피가리는 이에 개의치 않는다.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행복하고 조화로운 시간을 꿈꾸듯 보여준다. 빠르고 불확실한 획은 다소 이상화된 기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작품을 더욱 유동적으로 만든다.

“나는 모델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풍경화에도 그렇다. 모든 일은 내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나는 기억 속으로 뛰어들고 <...>무엇보다도 과거를 그린다. 오래전 사라진 것들을.” 부정확성은 기억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가 그려내는 관계의 부정확성과 유동성이 역사와 통합되면서 진실의 퍼즐이 맞춰진다.

우루과이는 이름난 목축 국가다. 피가리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비옥한 평야 지대인 팜파스를 구축해낸다. <팜파스의 망아지 떼>(1930)에서 그는 수평선을 아주 낮게 배치하여 팜파스의 평평하고 개방된 측면을 강조하면서 푸른 색조의 달무리가 망아지 떼의 갈색 살결에 스미는 시간대를 묘사했다. 팜파스를 묘사한 그의 작품에는 달과 야생마 떼가 항상 존재하는데 이는 광활한 평원과 관련된 신화적인 아우라를 상기한다. 무엇보다 생생한 꿈이다.

페드로 피가리 <팜파스의 망아지떼> (1930)

페드로 피가리 <팜파스의 망아지떼> (1930)

서정 에세이스트•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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