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비틀고, 날선 시선에 맞섰다 … 거침없는 붓질로 세계를 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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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비틀고, 날선 시선에 맞섰다 … 거침없는 붓질로 세계를 홀렸다

해외서 먼저 알아봤다 … 한국미술 이끌 차세대 작가 4인
1인칭 누드화 작가 백승아
동양화 기법 서양화에 접목
김훈규, 고려불화 기법 활용
비단 한폭에 세상사 담아내
극사실주의 자화상 김상우
한나 허, 추상화로 상실 표현
단색화로 대표되던 K아트
차세대 작가들 새 영역 개척

김상우 'You're looking at me 012'(2026).

김상우 'You're looking at me 012'(2026).

미국 마이애미의 현대미술 중심지인 루벨뮤지엄. 장미셸 바스키아, 키스 해링 등 현대미술의 거장들을 초기 발굴한 컬렉터 돈·메라 루벨 부부가 운영하는 이곳 미술관에는 한국인 작가의 대형 회화 작품이 걸려 있다. 동양화 기법으로 표현한 왜곡된 시점의 누드가 화면을 채운다. 이 독창적인 작업으로 현지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주인공은 한국 작가 백승아(47)다.

백승아는 전통 동양화 기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서구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기고 있다. 서울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런던 골드스미스대에서 석사를 마친 그는 2016년 사치갤러리 단체전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현재 루벨뮤지엄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그는 전통 초상화에서 인물의 피붓결을 정교하게 표현할 때 쓰는 '육리문(肉理紋)' 기법을 현대적 누드화에 도입했다.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관능적인 대상으로서의 누드가 아닌, 작가 자신의 시선으로 몸을 내려다본 1인칭 시점의 누드 자화상을 그린다. 작가는 드로잉 위에 먹과 전통 안료를 여러 차례 쌓아 올려 피부의 주름과 결, 셀룰라이트까지 세밀하게 묘사한다. 최근에는 주름진 손과 굳은살 등 시간의 흔적이 남은 신체를 화면에 담으며 몸의 변화와 삶의 경험까지 기록한다. 서구 미술계가 아시아 여성 작가에게 기대해온 전형적인 이미지 대신 신체의 주체성을 보여주는 셈이다.

 Mars Red'(2025).  보르톨라미

백승아 'Autolandscape: Mars Red'(2025). 보르톨라미

◆ 동양화 기법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각광

최근 글로벌 미술 시장의 중심지인 영국 런던,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LA)에서 백승아를 비롯한 한국 차세대 작가들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이우환, 박서보 등 단색화로 대표되던 한국 미술의 흐름이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로 확장되는 모습이다. 단색화가 정제된 추상과 수행적 태도로 서구 미술계에 진입했다면, 차세대 작가들은 서구 사회에서 겪은 디아스포라의 경험과 한국 전통 기법의 현대적 변주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구축하고 있다. 글로벌 갤러리 페로탕 소속으로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훈규(40) 역시 동양화의 현대적 진화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는 프리즈 런던과 아트바젤 홍콩 등 글로벌 아트페어에서 꾸준히 주목받고 있다.

김훈규의 작업은 고려불화와 비단 채색기법을 현대적으로 활용한다. 그의 그림은 멀리서 보면 정교한 고전 장식화나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의인화된 동물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들은 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태극기를 흔들며, 제사를 지내거나 예배를 보는 등 현대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서사적으로 정교하게 담아내는 방식이다.

김훈규 'Bluish Green'(2025).  페로탕

김훈규 'Bluish Green'(2025). 페로탕

◆ 한국계 교포 작가들, 경계인의 경험 반영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김상우(32)는 최근 유럽 미술계가 주목하는 한국계 신진 작가다. 그는 이탈리아 아트페어 '아르테 피에라 볼로냐 2025'에서 신진작가에게 수여하는 마르발 컬렉션상을 받았고, 영국의 유력 갤러리 '헤럴드 스트리트(Herald St)' 전속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4년 헤럴드 스트리트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출품작 25점이 모두 판매됐고, 올해 아트바젤 홍콩에서 솔로 부스와 이탈리아 베네치아 아마 재단 그룹전에 잇달아 참여하며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서울에서 태어난 작가는 어린 시절 가족을 따라 영국으로 이주했다. 서구 사회에서 동양인으로 자라며 겪은 인종 차별, 정체성의 혼란과 고민은 그의 캔버스 위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그는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자신의 얼굴을 반복해서 그린다. 눈과 피부 일부를 클로즈업하는 작품도 많다. 에르메스, 돌체앤가바나, 버버리 등의 모델로 활동하면서 이국적인 존재로 소비되고 대상화됐던 경험도 작품에 스며 있다. 그의 자화상은 또렷하게 응시하고 있는 눈이 특징이다. 여기에는 이방인으로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온 기억이 담겨 있다. 자신을 타자로 규정하는 시선에 맞서는 것이기도 하다.

한나 허 'Threshold'(2024).  한나 허

한나 허 'Threshold'(2024). 한나 허

◆ 한국적 경험을 보편적 서사로 확장

LA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한국계 캐나다인 작가 한나 허(41)도 디아스포라의 경험을 자신만의 추상 언어로 풀어낸다. 그의 작품은 LA현대미술관(MOCA)과 해머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그의 화면에는 촘촘한 격자무늬와 유기적인 곡선, 끝없이 순환하는 나선형 구조가 반복된다. 질서를 상징하는 격자와 끊임없이 흐르는 곡선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긴장은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디아스포라의 심리와 맞닿아 있다. 회화뿐 아니라 설치 작업에서는 캔버스를 공간으로 확장해 관람객이 작품 안을 거닐며 경계와 이동의 감각을 직접 체험하도록 만든다.

한나 허 작품은 특정 문화권을 설명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한국계 이민자의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기억과 이동, 소속감과 상실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추상적인 공간 언어로 번역해낸다. 이러한 점이 서구 미술관들이 그의 작업에 주목하는 이유다.

[정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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