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동 계곡에서 내려오는 길은 굴곡이 심한 S자형 골목이다. 이런 길은 대체로 하천 위를 복개한 것으로 보면 맞다. 도시를 설계할 때도 그렇고 집을 지을 때도 사람들은 일직선을 선호하지 일부러 휘어진 길 사이에 집을 짓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길을 걷다 보면 네모난 맨홀 뚜껑들을 발견한다. 아무런 표식이 없는 네모난 맨홀 뚜껑은 길 아래 하천이 있다는 표식이다. 이 하천은 어디로 흐르는 것일까? 수성동계곡에서 흐르는 물과 동쪽 지류 옥류동에서 내려오는 옥류동천과 만나 청계천으로 흘러간다. 비 오는 날 자세히 들으면 길 아래에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수성동 계곡에서 통인시장 앞 팔각정까지 이어지는 이 S자형 계곡의 흐르는 물길을 상상해 보라. 인왕산의 화강암 너럭바위 사이사이 흐르는 물길 섶에는 수양버들을 비롯한 나뭇가지들이 천변을 적시고, 볕 좋은 봄날에는 드문드문 각종 야생화가 피어났을 것이다. 인왕산에서부터 무리 지은 복사꽃들이 동네를 주홍색으로 물들이지 않았을까? 이 길을 드나들었던 문인과 화가들은 여기저기 모여 시회를 열고, 배짱 좋은 남정네들은 막걸리 한 사발에 낮잠을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당시의 모습을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수성동 계곡에서 우측 편의점 아래 붉은 벽돌로 지어진 튼튼한 집을 보면 당시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푸른 양귀비'라고 쓰인 카페로, 현재는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 중이다. 육중한 나무 문을 열고 들어서면 다른 곳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모습이 등장한다. 한쪽 벽면이 화강암의 투박한 돌덩이가 돌출된 그대로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이 건물은 인근의 군수공장 직원들의 숙소였다고 하는데, 인왕산에서 흐르던 계곡 옆 바위들이 S자형 계곡을 따라 이어졌던 흔적이다. 이런 육중한 화강암 석재들은 길 주변의 인가들에도 흔하게 볼 수 있다. 물길 좌우에 있던 커다란 바위들이 아직도 여기저기에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얼마 전 우연히 본 1961년의 흑백영화 <마부>의 인트로에 이 길이 등장해서 깜짝 놀랐다. 가난했던 그들의 체취, 자동차의 등장으로 쇠락해 가는 운송 수단 마차와 말, 그리고 말을 부리는 마부의 고단함이 영화에서 서촌의 풍광과 함께 전해진다.
조금 내려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애송하는 「서시」를 쓴 윤동주가 하숙했던 집터가 나온다. 청소년기에 그의 시를 읊조렸던 사람들이 어디 나뿐이었을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게 살기를 맘속 깊이 읊조려도, 세파는 이마의 주름과 흰머리를 피해 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집 앞에 서면 마음만은 윤동주의 시를 읊조렸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
「서시」, 「별 헤는 밤」 등 시 16편, 산문 1편이 1941년에 쓰였다. 그는 1941년 5월부터 여름방학이 끝나는 8월 말까지 이곳에서 지냈는데, 말을 하면 그것이 시가 되고, 낙서가 곧 시편이 되는 그런 시기였다. 「십자가」, 「돌아와 보는 밤」은 이곳에서의 삶을 조금 짐작하게 한다.
「돌아와 보는 밤」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 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 방 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빗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1941년 6월에 쓴 시)
시에서 등장하는 '내 좁은 방'이 이곳 누상동 9번지에 있던 그의 하숙방이다. 태평양전쟁으로 조선이 병참기지화 되어 모든 물자가 부족한 시기에 이곳으로 들어왔다. 농촌의 놋숟가락까지 공출해 가는 전쟁 막바지의 비참한 상황이 지속되자 연희전문의 기숙사에서 지원하던 물자들이 끊겼다. 전쟁으로 쌀까지 공출하여 늘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살 수밖에 없었다.
기숙사를 나와 2년 후배인 정병욱과 하숙집을 구하러 다녔다. 물어물어 다니다가 경치 좋은 이곳 인왕산 기슭에까지 이르렀다. 수성동 계곡을 구경하고 내려오면서 하숙집을 찾아 여러 집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김송'이라고 쓰인 문패를 발견했다. 설마 연희전문 국문과 김송 교수의 집이 아닌가 하여 찾아 들어가니, 교수님 댁이 맞았다. 이곳에서 그해 8월 말까지 하숙하게 된다. 식사를 물린 후에는 언제나 성악가이며 하숙집 아주머니이기도 한 김송의 아내가 불러주는 가곡을 들을 수 있었다. 그 후에는 윤동주의 시 낭송이 이어졌다. 문학과 음악이 있는 '문학의 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송석원 정자를 짓고 시인 묵객들이 놀았던 백 년 전의 낭만이 교수 부부와 제자들에 의해서 재현되고 있었다.
윤동주는 아침에 눈을 뜨면 정병욱과 이른 산책을 나섰다. 수성동 계곡에서 찬물로 세수하고 더 올라 인왕산 중턱에서 오른쪽까지 언덕에 이르는 코스였다. 지금 '시인의 언덕'이라 부르는 윤동주 문학관은 두 청년이 산책 끝에 맞는 곳이다. 이곳에서 굽어보는 서울의 전경을 보고 윤동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누상동 9번지에서의 생활이 젊은 시인 윤동주와 정병욱이 누렸던 마지막 호사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후 윤동주의 고통스러운 삶을 보면 알게 된다. 요시찰 인물로 일본 고등계 형사의 추적을 받던 김송 교수가 가택 수색을 받게 되자 이곳에서의 4개월 하숙 생활은 막을 내린다.
이 시절 함께 지낸 정병욱 교수의 증언이 있다. 연희전문에서 학교가 파하면 신촌역에서 경의선을 타고 하교했다. 신촌, 아현, 서소문을 지나 경성역에서 내려,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로 이동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문화의 중심지였다. 두 청년은 명동과 충무로 책방들을 돌아다닌 뒤, 후유노야도(冬の宿)나 남풍장(南風莊)이란 음악다방에 들러 음악을 듣고는 간혹 명치좌(현 명동예술극장)에 들러 영화를 보기도 했다. 메이지정(현 명동)에서 효자동 종점으로 가는 전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마도 통의정이나 적선정 정거장에서 내렸을 것이다.
"거기서 또 걸어서 적선동 유길 서점에 들러 서가를 훑고 나면 거리에는 전깃불이 켜져 있을 때가 된다. 이리하여 누상동 9번지로 돌아왔다."(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에서)
아마도 「돌아와 보는 밤」이라는 시는 이렇게 시내를 활보한 뒤 돌아와 쓴 시였을 것이다. 비가 내려 촉촉한 서촌의 옥인길, 그가 살았던 1941년 이곳은 복개하지 않고 천변에 난 소롯길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는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와 계곡물 소리였다. 그는 무엇이 부끄러워 좁은 방에 들어와 불을 끈 것일까?
청년 시인 윤동주는 허기진 마음을 지식으로 채우고자 했다. 서점을 들러 책을 보고 영화를 관람하기도 했다. 그래서 생각과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갔다. 그러나 지식만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무와 울분이 피어올랐다. 식민 시절, 태평양 전쟁의 광기가 학교에까지 이르러 이곳 수성동 계곡에까지 이르렀지만, 이곳도 그에게 참된 안식처는 되지 못했다. 누상동 9번지 그의 하숙집터에 오면 그 시절 윤동주의 마음이 읽힌다.
한이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