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스캠 산업의 실체 추적… 범죄 단지 생존자 96명 인터뷰
휴대전화-신분증 빼앗고 감금… 투자 사기 등 온라인 범죄 강요
목표치 못 채우면 체벌 받기도
◇스캠/이반 프란체스키니, 링 리, 마크 보 지음·이정우 옮김/ 352쪽·2만5000원·산지니
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처벌받고, 도망치려 하면 몸값을 요구받았다. 장 씨가 중국 명문 연구기관 출신 박사란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었지만, 함께 갇혔던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범죄 단지에 남아 있었다.
이런 유의 이야기는 이제 낯설지 않다. 지난해 캄보디아 캄포트의 한 범죄 단지 인근에서 한국인 남성이 살해된 뒤 시신이 쓰레기통에서 발견되면서 동남아 스캠 범죄의 실체가 국내에도 충격을 던졌다. 온라인 투자 사기와 로맨스 스캠은 이제 국경을 넘나드는 거대한 범죄 산업이 됐다.
신간 ‘스캠’은 그 산업의 실체를 집요하게 추적한 기록이다. 호주 멜버른대 아시아연구소 강사 이반 프란체스키니와 동남아 연구자 링 리, 마크 보는 2022∼2024년 캄보디아·미얀마·라오스에서 생존자 96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최연소 생존자는 겨우 14세였다. 저자들은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범죄 단지 내부의 노동과 통제, 그리고 초국경 범죄 네트워크가 형성된 과정을 입체적으로 복원한다.책이 가장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대목은 스캠 산업이 거대한 산업으로 진화했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팬데믹을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꼽는다. 카지노와 온라인 도박으로 돈을 벌던 중국계 카지노 자본과 범죄조직은 급감한 수익을 메우기 위해 기존 인프라를 온라인 스캠 산업으로 빠르게 전환했다. 범죄는 더욱 조직화됐고, 국경을 넘나드는 공급망처럼 작동하기 시작했다.
범죄 단지 내부를 묘사하는 대목은 더욱 섬뜩하다. 조직은 흔적이 남는 구타보다 계단을 반복해 오르내리게 하거나, 한낮의 땡볕에 장시간 세워두고, 기마 자세를 강요하는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통제했다. 피해자가 경찰에 호소하더라도 폭행 사실을 입증하기 어렵도록 계산된 처벌이었다. 책은 그저 단속만 하는 게 능사가 아니란 점도 짚는다. 중국 당국의 단속으로 노동력 모집 비용이 수만∼수십만 위안까지 치솟자 범죄조직은 확보한 인력을 더욱 강하게 붙잡기 시작했다. 탈출이나 석방은 그만큼 어려워졌다.
범죄 조직의 노동력도 갈수록 국제화되고 있다. 한때 중국어권 인력이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출신 국가와 연령, 성별, 교육 수준이 모두 다양해졌다. 국제기구들은 동남아 범죄 단지에 40개국이 넘는 국적의 사람들이 갇혀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 자국 대사관조차 없는 국가 출신 피해자도 적지 않아 구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사이버 스캠의 실제 규모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피해자들이 신고를 꺼리는 데다 국가마다 집계 기준과 법 집행 방식이 달라 일관된 통계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스캠’은 이 빈틈을 생존자들의 육성으로 메우며, 온라인 사기를 단순한 금융 범죄가 아니라 사람을 사고팔고 감금하는 현대판 인신매매로 바라보게 만든다. 생성형 인공지능(AI)과 딥페이크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시대에 온라인 사기는 앞으로 어디까지 악화될까. 여러 생각이 들게 만드는 묵직한 책이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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