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경주에 울려퍼진 베토벤의 '황제'와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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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교향악단이 계관 지휘자인 정명훈과 경주를 찾았다. 올 11월 이곳에서 열리는 ‘2025 APEC 정상회의’를 기념하는 차원에서 이달 13~15일 열린 축제인 ‘2025 경주국제뮤직페스티벌’의 첫날 공연을 맡았다. 협연자는 2017년 밴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불멸의 역작으로 남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와 교향곡 5번 ‘운명’을 선보인 이들의 공연으로 1053석 규모인 경주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이 꽉 찼다.

지난 13일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토벤 음악 공연에서 KBS교향악단과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정명훈의 지휘 아래 연주하고 있다. /사진 출처. 경주문화재단

지난 13일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토벤 음악 공연에서 KBS교향악단과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정명훈의 지휘 아래 연주하고 있다. /사진 출처. 경주문화재단

통통 튀는 선율에 섬세함이 섞인 ‘황제’

황제는 베토벤이 마지막으로 완성했던 피아노 협주곡이다. 모차르트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그의 피아노 협주곡 1·2번보다 베토벤만의 개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3개 악장이 하나의 곡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장대한 서사를 드러내는 게 매력이다. 관객들의 열띤 박수와 함께 무대에 나타난 정명훈과 선우예권은 각자 포디움과 피아노에 자리하자마자 1악장을 시작했다. 선우예권은 경쾌한 손놀림으로 새가 지저귀는 듯한 고음을 띄우며 단번에 청중을 무대에 몰입시켰다.

선우예권과 악단은 춤을 주고받는 무용수들처럼 서로가 건넨 리듬과 음량을 고스란히 살려 곡의 흐름을 매끄럽게 이어갔다. 이따금 피아노가 속도를 더 내려는 듯 할 땐 정명훈의 절도 있는 지휘가 마라톤의 페이스메이커처럼 템포를 고르는 역할을 했다. 선우예권에게서 바로 돋보였던 부분은 오른손의 경쾌한 타건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존재감을 뽐냈던 왼손이었다. 그의 왼손은 리듬을 보조하는 반주라기보단 오른손과 대화하며 음악을 풀어가는 독립된 유기체 같았다. 양손이 만들어내는 흥겨움에 악단과 어우러진 형식미가 섞이자 피아노 소리가 관객들에게 안정감을 안겨줬다.

지난 13일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토벤 음악 공연에서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연주하고 있다.  /사진 출처. 경주문화재단

지난 13일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토벤 음악 공연에서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연주하고 있다. /사진 출처. 경주문화재단

지난 13일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토벤 음악 공연에서 정명훈이 지휘봉을 올리며 KBS교향악단을 이끌고 있다.  /사진 출처. 경주문화재단

지난 13일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토벤 음악 공연에서 정명훈이 지휘봉을 올리며 KBS교향악단을 이끌고 있다. /사진 출처. 경주문화재단

여유로움이 가득한 2악장에선 피아노가 깡충거리듯 연주했다. 황제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정원을 노니는 듯한 풍경이 그려졌다. 현악기들은 피아노를 빛내주는 멋진 조연이 됐다. 피아노 건반이 통통 튀는 소리를 낼 땐 현악기도 합을 맞춰 고스란히 퉁퉁거리는 울림을 줬다. 악단은 소리를 두텁게 쌓기보다는 섬세하게 다듬은 소리들을 무대 한가운데에 응집해놓으려는 듯했다. 세밀하고 조그만 소리가 이어지면 관객들도 섬세한 음량을 들으려 귀에 신경을 쏟기 마련이다. 선우예권은 이렇게 쏠린 집중을 건반을 두드리며 폭발시켰다. 관객들이 쌓아뒀던 긴장을 빠르게 풀어버리길 반복하면서 청각적인 쾌감을 선사했다.

도자기를 빚듯 풀어낸 ‘운명’

피아노의 현란한 속주로 시작된 3악장은 선우예권이 에너지를 힘껏 폭발시키는 무대였다. 하이라이트는 건반을 강하게 두드린 손가락을 떼어냈을 때였다. 선우예권은 마치 건반이 쏜 총알에 맞은 것처럼 이마를 격렬하게 튕겨냈다. 피아니스트가 박력 있게 연주할 땐 망치처럼 두드린다는 말이 따라붙곤 한다. 선우예권의 강렬한 몸짓은 망치보다는 반동이 느껴지는 기관총에 가까웠다. 이 박력 뒤로 섬세함이 몰려올 땐 피아노가 개구쟁이 테너가 흥얼거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바이올린은 이 노래에 맞받아치는 새침데기 소프라노 같았다. 베토벤의 견고한 형식미를 노래하듯 발랄하게 풀어낸 악단과 선우예권의 해석이 빛난 마지막 악장이었다.

지난 13일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토벤 음악 공연에서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연주하고 있다.  /사진 출처. 경주문화재단

지난 13일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토벤 음악 공연에서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연주하고 있다. /사진 출처. 경주문화재단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은 선우예권은 앙코르 곡으로 그가 즐겨쳤던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골랐다. 들떴던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연주였다. 이날의 경주는 여름을 알리는 장맛비가 한창이었다. 선우예권이 건반을 살포시 눌러서 생긴 부드러운 소리는 공연장에 감돈 습기와 어우러져 물안개가 이는 듯한 촉촉함을 만들어냈다. 연주가 끝났을 땐 밝게 웃는 피아니스트와 그를 무대에서 떠나보내야만 하는 관객들의 아쉬워하는 표정이 엇갈렸다.

지난 13일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토벤 음악 공연에서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연주하고 있다.  /사진 출처. 경주문화재단

지난 13일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토벤 음악 공연에서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연주하고 있다. /사진 출처. 경주문화재단

KBS교향악단만의 무대였던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은 섬세했다. 베토벤을 도면 삼아 콘크리트 건축물을 올리기보다는 도자기를 빚는 쪽이었다. 운명적 순간을 알리는 1악장의 호른은 부드러웠다. 플루트는 둥글게 다듬은 소리를 기복 없이 표현했다. 세밀한 음량 조절로 다른 악기들을 훌륭하게 받쳐준 팀파니와 클라리넷의 묵묵한 헌신도 돋보였다. 저마다의 소리들을 실크처럼 겹쳐가며 만든 악단의 연주는 관객들에게 오늘날에도 여전한 베토벤의 매력을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지난 13일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토벤 음악 공연에서 지휘자 정명훈이 관객들의 박수에 화답하고 있다. /사진 출처. 경주문화재단

지난 13일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토벤 음악 공연에서 지휘자 정명훈이 관객들의 박수에 화답하고 있다. /사진 출처. 경주문화재단

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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