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리부트: ‘사망 제로’를 향해]
국내 신호, 초속 1m ‘젊은 성인’ 기준
영국은 보행속도 감지해 초록불 늘려
“충분히 건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몸이 따라주지를 않네요.”지난달 6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시장 인근 건널목을 건너던 함대익 씨(79)는 중간 지점인 중앙버스전용차로 정류장에서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초록불이 켜지자마자 발걸음을 옮겼지만, 중간에 이르기도 전에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었다. 순식간에 차로 위에 고립될 뻔한 함 씨는 밀려드는 버스와 택시를 피해 정류장에 올라서야 했다. 그는 “늘 신호가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청량리시장 일대는 서울의 대표적인 고령 보행자 사고 다발 지역이다. 4월 기준 인근 제기동의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26.5%, 청량리동은 34.4%로 서울 평균(약 20%)을 크게 웃돈다. 한국도로교통공단 교통사고분석시스템에 따르면 2022∼2024년에 이 일대에서 발생한 보행 노인 교통사고의 중상자만 9명에 달한다.
이날 약 2시간 동안 현장을 돌아보자 지팡이를 짚은 노인 보행자가 길을 다 건너기 전부터 “다음 신호에 건너세요”라는 안내 음성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3년째 청량리시장에서 ‘전통시장 시니어지원단’으로 활동 중인 임재수 씨(75)는 “초록불이 켜져 있는 시간 자체가 노인에겐 너무 짧다”고 말했다.이는 국내 보행 신호 체계가 ‘젊은 비장애인’ 기준으로 설계됐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건널목 신호는 보행에 문제가 없는 성인의 통상적인 속도인 초속 1m를 기준으로 산정된다. 고령층에게는 빠듯할 수 있는 기준이다. 지난해 영국 노년학 학술지 ‘에이지 앤드 에이징’에 게재된 연구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평균 보행 속도는 초속 0.77m에 불과했다.
전문가들은 노인 밀집 지역이나 병원 주변만이라도 차량 중심의 신호 체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도경 서울시립대 교통공학과 교수는 “전통시장이나 병원 주변처럼 고령층 통행량이 많은 지역은 초록불 시간을 늘리거나, 신호 종료 전 충분한 여유 시간을 주는 등 보행자 중심으로 신호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고 짚었다.
나아가 보행자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반영해 초록불 시간을 늘려주는 지능형 교통 체계 도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강경우 한양대 교통물류학과 명예교수는 “고령 보행자의 실제 이동 특성을 반영해 신호를 유연하게 조정하는 지능형 교통 체계를 노인보호구역 중심으로 단계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해외 선진국들은 보행자의 속도에 맞춰 ‘스스로 늘어나는 신호등’을 폭넓게 도입하고 있다. 영국은 2016년부터 보행자가 버튼을 눌러야 초록불로 바뀌는 기존 ‘펠리컨 크로싱’의 신규 설치를 중단하고, 센서로 보행자의 이동 여부와 속도를 감지해 신호 시간을 자동 조정하는 ‘퍼핀 크로싱’을 대체 방식으로 도입해 왔다. 네덜란드는 차량과 자전거, 보행자 이동 정보를 실시간 반영하는 스마트 교통신호(iVRI) 체계를 점차 확대하고 있으며, 2024년 1월까지 해당 시스템을 전국에 1000개 이상 설치했다.특별취재팀
▽팀장 권구용 사회부 기자 9dragon@donga.com
▽김윤진(국제부) 임유나(산업2부) 주현우(경제부) 최효정(사회부) 한채연(산업1부) 기자
공동 기획: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 경찰청 소방청 서울시 한국교통안전공단 손해보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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