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 간호사 1호의 딸, 헬레나 파라다 김의 어떤 오마주

2 weeks ago 12

한국의 전통적 미학과 서양의 회화 기법이 만나는 지점에서, 헬레나 파라다 김은 자신의 정체성과 디아스포라라는 주제를 탐구해왔다. 오는 6월 말까지 초이앤초이 갤러리에서 펼쳐지는 개인전 <빛이 머무는 시간>을 통해, 작가는 이와 같은 주제들을 더 다양한 층위에서 풀어내고 있다.

한복을 입은 여성이 구릿빛 배경 앞에 서 있다. 그녀는 정면을 응시하며 양손으로 치마의 넓은 주름을 잡고 있다. 파란색 저고리와 대비되는 빨간색 치마에는 붓꽃이 그려져 있다. 그림의 배경은 넓은 붓터치로 평면성을 강조하는 단색인 반면, 화면 중앙의 한복은 촉각적이라고 할 정도로 매우 정교하고 생생하게 묘사된다. 전체 그림은 마치 미완성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얼굴은 물론 양손도 희미하게 스케치 된 상태다.

Veronika, 180 x 140 cm, Oil on linen, 2024_25 / 사진제공. 초이앤초이갤러리, 헬레나 파라다 김

Veronika, 180 x 140 cm, Oil on linen, 2024_25 / 사진제공. 초이앤초이갤러리, 헬레나 파라다 김

이번 전시에서 헬레나 파라다 김이 선보인 신작 ‘Veronika’(2024-2025)는 작가가 2013년부터 지속해온 한복 시리즈 중 하나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특징들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스페인 출신의 아마추어 화가였던 아버지와 한국 출신 간호사였던 어머니 아래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신이 화가가 될 것이라는 예감 속에 자란 헬레나 파라다 김이 자신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다.

시리즈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동서양의 미술 전통이 만나는 독특한 스타일이 형성됐고, 이는 디아스포라를 겪는 모든 이들을 위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자리잡았다. 작가에게 그 예술적 여정을 듣기 위해 전시 개막 이튿날 초이앤초이 갤러리를 찾았다.

헬레나 파라다 김 / 사진. ⓒ이현준

헬레나 파라다 김 / 사진. ⓒ이현준

▷‘한복’ 시리즈는 어머니의 오래된 가족 사진 앨범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60~1970년대 박정희 정부에서 광부와 간호사를 서독에 파견하는 정책을 폈고, 그때 어머니가 독일로 이주한 첫 번째 한국 여성 간호사 중 한 명이었다고요.

"독일은 이 시기에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며 많은 요양 병원이 많이 생겼는데, 그곳에 간호사들이 턱없이 부족했어요. 1차 파독 간호사 128명이 1966년 독일에 도착했고, 어머니 역시 그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저는 독일에서 살며 유럽식 교육을 받았지만, 어린 시절 어머니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받았어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던 스무 살 때 처음 한국을 방문했는데,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정체성에 관한 여러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빛 바랜 앨범 속에는 1960년대 독일로 떠나기 전, 어머니를 포함한 다섯 자매가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어요. 고국과의 영원한 이별이 예감된 슬픔 속에서, 더 큰 세상에서 기회를 잡고 가난한 고국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희망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어요. ‘한복(Hanbok)’이라는 주제는 제 자신의 정체성의 뿌리를 찾는 출발점이었고, 점차 더 많은 의미를 담게 됐습니다."

▷2010년대 중반 제작된 한복 시리즈에는 ‘Yujin’(2015), ‘Seung Za’(2015)와 같이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작품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반면 최근작들은 ‘Hanbok 2’(2022), ‘A Sister’(2025)처럼 직관적인 일반명사를 사용합니다. 또한, 당신의 작품은 얼굴보다는 의복에 초점을 맞추는데요. 얼굴이나 손은 흐릿하게 처리되거나 아예 생략되기도 해요. 이런 공통점과 차이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초기에는 어머니와 동료 간호사들이 독일에 올 때 가져온 한복을 입고 모델로 서달라고 하여 그림을 그렸습니다. 한복을 통해 드러나는 정체성과 그들의 감정적인 임팩트에 큰 관심이 있었죠. 물론, 한복이라는 의복 자체가 지닌 문화적 상징성과 미학적 아름다움에도 집중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어요. 사실, 파독 간호사들은 독일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고, 인정도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정체성의 상실이나 소외감 같은 어려움도 겪었을 거예요. 여전히 한복 시리즈를 그릴 때면 어머니나 이모를 떠올립니다. 그래서 작품들이 비록 일반명사의 제목을 가졌어도, 개인적으로 그분들에 대한 오마주라 할 수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른 의미를 떠올리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미래의 상실입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더 이상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어머니를 상징하는 세계도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죠.

Nurses and Cranes - 2025, 60 x 80 cm, Oil on Alu-Dibond, 2025, framed / 사진제공. 초이앤초이갤러리, 헬레나 파라다 김

Nurses and Cranes - 2025, 60 x 80 cm, Oil on Alu-Dibond, 2025, framed / 사진제공. 초이앤초이갤러리, 헬레나 파라다 김

한복 시리즈에서 얼굴이 희미하거나 아예 보이지 않음으로써 작품은 익명성을 띱니다. 보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개인의 역사를 떠올리게 되고, 개인과 집단의 역사적 서사를 탐구하는 시작점이 됩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사회적, 개인적 이유로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살아가며, ‘이 사회에 내가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안고 있죠. 제가 그린 간호사 초상과 한복 시리즈는 1960년대 한국을 떠난 분들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디아스포라를 겪는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당신 이름에는 성이 두 개입니다. ‘파라다’는 스페인 출신의 아버지에게서 받았고, ‘김’은 한국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이죠. 두 분은 어떻게 독일에서 만났나요? 아버지가 아마추어 화가였다고 알고 있는데, 맞나요?

"당시 19세였던 어머니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언니와 함께 독일로 건너가 퀼른의 한 시설에서 교육을 받던 중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아버지는 스페인 출신의 수도사였고,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였어요. 어머니가 독일행을 택한 이유도 한국에서 만난 독일 선교사가 일자리를 소개해주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수도원을 떠나고 싶어 했고, 그때 어머니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이루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는 아마추어 화가셨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웠고, 서양의 올드 마스터들이 그린 작품을 모방하며 실력을 키웠어요. 16세부터는 사설 교육 기관에서 회화 기법을 전문적으로 배웠는데, 특히 벨라스케스나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같은 스페인 화가들의 초상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그리고 20세가 되던 해에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에 입학했죠. 친할머니도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갖고 계셨지만, 그 시대에는 여성이 활동할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아버지 역시 여건이 좋진 않았죠. 그래서 제가 미술가로 활동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정말 특별한 기쁨이었던 것 같아요. 2019년에 글라드 백의 시립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 아버지의 환한 웃음이 떠올랐습니다. 지난해 쾰른 동아시아미술관의 전시에서는 아버지가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하셨습니다."

헬레나 파라다 김 / 사진. ⓒ이현준

헬레나 파라다 김 / 사진. ⓒ이현준

▷이번 전시에서, 당신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공통점인 서양의 회화적 테크닉과 동양의 문화적 미학이 더욱 다층적이고 적극적으로 결합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아미타불’(201)과 ‘산 제로미노’(2021)가 그런 작품인데, 이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아미타불’(2021)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19세기 조선 시대 그림 ‘아미타불설법회’를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꽤 작은 크기입니다. 부처인 아미타불과 그의 제자, 보살들이 양옆에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평평한 정면 구조를 대형 연극의 배경처럼 활용해 그 앞에 훨씬 작은 지상의 여성 인물들을 배치했어요. 이 인물들을 기념비적인 신들의 영적 영역으로 끌어올리고 싶었어요. 사실, 이 두 명의 할머니는 한국에 계시는 저의 고모들이에요.

아미타불, 2021 / 사진. ⓒ김상태, 제공. 초이앤초이갤러리

아미타불, 2021 / 사진. ⓒ김상태, 제공. 초이앤초이갤러리

‘산 제로미노’에는 산신이 등장하는데, 산신은 유럽에서 잘 알려진 은둔의 성인, 성 제롬(산 제로미노)의 모티브를 떠올리게 합니다. 영국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된 유명한 그림 ‘성 제롬의 서재’는 15세기에 이탈리아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가 플랑드르 유화 기법을 도입해, 공간의 깊이와 정교한 세밀함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특히 기독교 도상학에서 불멸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공작새가 전경을 가로지르는 환상적인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저는 성 제롬 그림에서 항상 등장하는 사자를 호랑이로 대체했고, 공작새 역시 그대로 인용했어요. 그리고 작품 속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은 서울 거리에서 목격한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모습입니다. 이 평범한 순간을, 종교적 도상과 결합해 시대를 초월하는 서사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입니다.

산 제로미노, 230 x 160 cm, Oil on linen, 2021 / 사진제공. 초이앤초이갤러리, 헬레나 파라다 김

산 제로미노, 230 x 160 cm, Oil on linen, 2021 / 사진제공. 초이앤초이갤러리, 헬레나 파라다 김

이런 겹겹의 내러티브를 구축한 이유는 두 가지예요. 하나는, 서양의 회화적 테크닉과 동양의 미학적 요소를 결합하려는 저의 관심사 자체가 피상적이거나 일러스트처럼 보여질 수 있다는 우려를 넘어설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이러한 방식이 제가 화가로서 배운 전통과 자연스럽게 연결된 결과이기도 하고요. "

▷당신의 작업에는 때때로 피상적이거나 섬세함이 부족하다는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오랜 탐구와 모색 끝에 발굴한 ‘한복’이라는 주제 자체가 한국인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갤러리를 나가서 경복궁에 가면, 한복을 입고 궁을 거닐며 풍경을 감상하는 많은 사람들이 보이죠. 그러나 이와 별개로, 두 문화의 혼합은 이미 제 정체성 그 자체이며, 저를 만들어온 근본적인 토대입니다. 제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제 배경을 몰라도, 무의식중에 저의 내면적 배경이나 경험이 어느 정도 느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이러한 주제 아래 작업을 계속해왔지만, 아직 탐구하고 싶은 주제가 많이 남아있어요. 그중 하나가 바로 ‘식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열정이 넘치는 아마추어 정원사로서 식물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식물 시리즈도 계속되고 있는데요. 앞으로는 식물의 세계를 탐구하는 쪽에 더 집중할 것 같습니다. "

Two Sisters, 30 x 20 cm, Oil on Copper, 2025, framed / 사진제공. 초이앤초이갤러리, 헬레나 파라다 김

Two Sisters, 30 x 20 cm, Oil on Copper, 2025, framed / 사진제공. 초이앤초이갤러리, 헬레나 파라다 김

▷당신의 작품을 보면, 뛰어난 회화적 테크닉이 주는 쾌감 역시 매우 강하게 느껴진다는 걸 말하지 않을 수 없네요. 특히, 동서양의 유산을 아우르는 회화 작품들을 열심히 관찰하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매력적인 차별 요소는 무엇인가요?

"한국화를 비롯한 동양 회화는 대체로 배경이 절제되고 생략되는 경우가 많으며, 가볍고 고요한 느낌이 듭니다. 저 역시 제 작품에서도 그런 영향을 받아 배경을 조용히 처리하는 편이에요. 이는 동양 철학에서 강조하는 ‘공’ 사상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공’은 비움과 텅 빈 상태를 의미하며, 그 공백이 작품 속에 담긴 정신적인 고요와 일체감을 만들어내죠. 반면, 서양 회화는 매우 사실적이고 정밀하며, 공간을 꼼꼼하게 채우는 정교함이 특징입니다. 저 역시 그런 경향이 강해서, 때때로 스스로에게 ‘여기서 멈춰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비움의 미학’을 경험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림에서 ‘그리지 않음’을 통해 존재의 깊이와 신비로움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제가 추구하는 또 다른 목표이기도 합니다."

안동선 미술 칼럼니스트

헬레나 파라다 김 개인전 '빛이 머무는 시간' 전시 전경 / 사진. ⓒ김상태, 제공. 초이앤초이갤러리

헬레나 파라다 김 개인전 '빛이 머무는 시간' 전시 전경 / 사진. ⓒ김상태, 제공. 초이앤초이갤러리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