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사장님 말에 따르면 오트밀색 시트 위에 뽀얀 햇살이 바코드처럼 찍힌 그 집이 제가 임대를 준 작고 오래된 빌라라고 했습니다. 아닌데, 그 빌라는 방이 두 개뿐. 아니, 창 밖은 그 동네가 맞는 거 같기도. 그런데 그 집이 왜 당근 매물로 올라와 있을까?
“세입자가 당근마켓에 올리셨더라고요. 역시 젊은 분이라 집을 너무나 예쁘게 찍으셨어요. 하지만 거실을 방으로 올린 거나, 세를 내린 건 아니다 싶어요. 집수리, 해주시기로 한 건가요?”
‘빅뱅’이 글로벌 뮤지션으로 떠오른 뒤, 저는 그 빌라를 매입했습니다. 작고 낡았지만, 창 너머로 Y엔터 사옥이 한눈에 들어오기에, 팬들이 찾는 에어비앤비를 운영해보겠다는 야심 찬 플랜을 세웠거든요. 일단 세를 주었죠. ‘힙’한 동네답게 아이돌의 데뷔만큼이나 자주 세입자가 바뀌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Z세대였어요. 그리고 그 중 한 명은 진지한 의미에서 ‘아티스트’였답니다. 그가 래퍼인 건, 새 계약을 앞두고 방문했을 때 집 전체에 계란판을 붙여 스튜디오로 바꿔놓은 것을 보고 알았죠. 수줍어 저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던 그가 바로 최단 시간 유튜브 1억뷰를 달성한 K팝 래퍼가 되었다, 라고 말한다면 완벽했겠지만, 지금도 저는 가끔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보곤 합니다.그 집의 마지막 세입자 역시 젊은이였는데, 다양한 계획을 세웠다가 폐기하면서 그때마다 ‘나가겠다’와 ‘계약기간을 채우겠다’를 반복했고, 급기야 또 가출할 계획이 생기자 이번엔 부동산 중개료를 아끼기 위해 당근마켓에 직접 매물을 올린 것이었어요. 그는 “직접 인테리어도 하고 사진을 찍었으며 ‘살짝’조건을 바꿨다”는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요즘 당근마켓에서 최고가 거래 상품은 에르메스도, 메르세데스도 아닌 부동산입니다. 2022년 부동산 거래는 7000건 정도였는데 2024년에 5배가 훨씬 넘는 4만 건에 달했다고 합니다. ‘오늘의 집’ 사진처럼 꿈같은 인테리어 사진을 보면, 거래물품은 부동산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인 듯 합니다. 보송한 매트와 싱크대에 무심하게 올려진 민트색 르크루제 냄비, 아슴아슴한 햇살을 조심스레 내비치는 상아색 레이스 커튼. “제가 너무 신경 써서 고른 천으로 맞춘 커튼, 원하시면 남기고 갈게요”라는 설명은 또 얼마나 예쁜가요. 이렇게 비슷한 인생관을 가진 거래자와 직거래를 하면 중개수수료를 아낄 수 있고 다소 위압적(?)으로 밀어 부치는 부동산 사장님을 만나지 않아도 되니 합리적인 MZ세대에게 딱 맞을 수밖에요.
하지만 다른 매물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예쁜집 #풀옵션 #조명놀이로 나온 집을 발견한 건 오로지 자신의 검색력 덕분임을 믿는 이들은 사기 매물에 들어서자마자 계약금을 송금하기도 하고, 직거래자가 전화로 “지금 집 앞인데 비번 좀 알려주실래요? 내부 상태 확인만 할게요”라고 말하면 순순히 비번을 털어놓기도 한답니다. 반면 사기꾼은 사회초년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최저가’와 사진들이며, 디지털 인류가 대면 압박에는 취약하다는 것도 간파하고 있습니다. 젊은 세입자는 유튜브에서 배운 대로 등기부 등본과 주민등록등본, 인감증명서, 세금완납증을 깐깐하게 요구합니다(옛날식 거래에 익숙한 임대인이라면, 계약을 할지 말지 알 수 없는 젊은이에게 온갖 재산 상황을 보고하는 게 유쾌한 대화는 아니어서 이 단계에서 계약이 깨지는 일도 많아요).하지만, 전 재산을 건 부동산 거래에서 행운의 매물을 만난 젊은이는 그 모든 종이들이 가짜일 수도 있다는 점을 잊습니다. 제가 만난 세입자 중 한 명은 계약서 문구 하나하나 검토할 정도로 꼼꼼했지만 이체 한도에 걸려 잔금을 나눠 보내다가 1000만 원이나 더 송금하고도 전혀 알지 못했어요. 부동산 거래는 이웃 커뮤니티와는 달라요.좋은 집을 나만 싸게 득템하는 ‘행운’같은 건 바라지 말아야 해요. 저의 작고 낡은 빌라는 마지막 세입자의 이사와 함께 매매가 됐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당근마켓과 SNS를 통해 Z세대 세입자와 새로운 계약을 할 용기가 제게도 없었거든요.
@madame_carrot 당근, 고양이,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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