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8년 9월 3일 세종, 여진족을 도와주다[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3 weeks ago 32

1973년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세종대왕 표준영정. 사진 출처 세종대왕유적관리소 이문영 역사작가 조선 건국 후 최대의 적은 여진족이었다. 세종이 즉위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1418년 8월 28일, 압록강 북쪽 지류인 파저강 일대 여진족의 침입을 계기로 제1차 파저강 여진족 정벌이 시작됐다. 1437년(세종 19년)에는 제2차 파저강 여진족 정벌전을 펼쳤다. 총 7800여 명의 원정군이 압록강을 건너 여진족 수장 이만주의 근거지를 공격해 이들을 요동의 혼하 상류로 밀어냈다. 이 전과를 바탕으로 압록강 이남에 새로운 군을 설치한 것이 그 유명한 4군 개척이다. 두만강 쪽으로도 영토를 넓혀 갔다. 이미 태조 때 경원도호부를 설치해 두만강을 여진족과의 경계로 삼고자 했지만, 여진족의 거센 공세로 태종 때는 국경이 경성도호부까지 크게 후퇴했다. 이후 명이 이 땅을 탐낸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세종 초 다시 경원으로 진출했다. 여진족의 끊임없는 침입에 국경을 다시 후퇴시키자는 논의도 나왔지만 세종은 단호히 거부하고 전면 대결을 택했다. 1433년에 두만강 쪽 여진족에 내분이 일어나자 세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해 12월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보내면서 6진 개척이 시작됐다. 치열한 전투를 거치며 조선은 조금씩 영역을 넓혀 갔고, 살기 좋은 땅을 빼앗긴 여진족도 반격을 하며 북방은 계속 시끄러웠다. 6진 개척을 둘러싼 분쟁이 한창이던 1438년(세종 20년) 9월 3일(음력), 세종은 함길도 감사에게 특별한 명을 내렸다. “큰비가 내려 경성 이북 지역이 모두 물에 잠겼다 하니 내가 듣고 놀라 탄식했다. 이번 수재에 철저히 대비할 것이며 창고에 저축된 것으로 충분한지 알아보라. 또한 두만강 건너 여진족도 수재를 입어 집들까지 떠내려갔다고 하니 탐문하여 피해 상황을 보고토록 하라.” 세종이 여진족의 피해 상황을 알아보라고 한 것은 그들이 어려울 때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여진족의 집 139채가 떠내려가고 15명이 익사했으며 농작물도 모두 수해를 입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김종서는 조선 백성은 아니지만 그대로 둘 수 없다며 이들을 진휼하되 훗날 갚도록 하자는 의견을 냈다. 마침 그해 조선의 농사가 잘돼 양곡에도 여유가 있었다. 조정에서는 그들을 진휼하되 나중에 갚으라고 하면 고마움이 덜하고, 갚지 못해 탕감해 줘도 별로 기뻐하지 않을 것이니 처음부터 그들의 형편에 맞춰 진휼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세종도 이...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