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의 예술을 다룰 때 빠지지 않는 게 있다. 그라피티와 스티커로 대표되는 스트리트아트(거리 예술)다. 암스테르담 시내 곳곳에선 공공시설이나 벽면을 가득 채운 그라피티와 스티커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스테델레이크뮤지엄 정면에 있는 광장 외벽에도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을 정도다. 137년 역사를 자랑하는 클래식 음악 공연장인 콘세르트헤바우와 자유롭게 그려진 낙서가 맞물려 묘한 긴장감을 준다.
거리의 예술로 재탄생한 조선소
암스테르담의 거리 예술을 만끽하길 바라는 사람이라면 암스테르담 구시가지에 있는 중앙역으로 가야 한다. 이 역의 1층 플랫폼에선 암스테르담의 북부 지구인 NDSM으로 갈 수 있는 페리를 탈 수 있다. 별도 승차권 없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서울의 한강 역할을 하는 에이강을 15분가량 건너면 NDSM에 닿는다.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독특하고 창의적인 예술 실험이 일어나는 곳이다.
NDSM은 ‘네덜란드 조선 및 독 회사’의 앞 글자에서 따온 이름이다. 1920년대부터 조선소로 운영되던 이곳은 1980년대 네덜란드의 산업 구조가 바뀌는 와중 조선업이 쇠퇴하면서 폐허가 됐다. 버려진 공간을 채운 건 거리의 예술가들이었다. 신발 공장이 가득했던 서울 성동구 성수동, 금형 공장이 모여 있던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이 오늘날 팝업 전시 공간으로 바뀐 것과 비슷하다. 다른 점은 NDSM엔 조선소로 운영되던 대형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조선소의 부지 한편엔 세계 최대 규모 스트리트아트 미술관인 스트라트뮤지엄이 있다. 여러 아티스트가 참여한 벽화들이 가득해 누구나 그 외관을 알아볼 수 있다.
옛 조선소 건물 내부엔 아티스트들의 공동 작업실인 쿤스트스타트가 자리 잡고 있다. 공장 같지만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다. 대형 설치미술과 조각, 패션, 영화 촬영 세트 등이 어우러져 온갖 실험 예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소 부지에선 유럽 최대 규모의 빈티지 패션 벼룩시장인 ‘에이 할런’도 한 달에 한두 차례 열린다. 이곳에서 물품을 판매하는 매장 수만 750곳에 달한다. 거리의 예술을 패션으로 승화하길 바라는 이들이라면 벼룩시장이 열리는 때를 노려 방문하는 게 좋다.
알록달록 스티커의 도시 왜?
도심에서도 길거리 예술의 흔적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암스테르담 곳곳에 있는 가로등, 표지판, 전봇대 등의 뒤편엔 알록달록 붙어 있는 스티커들을 볼 수 있다. 반 고흐 미술관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도 스티커와 그라피티가 있을 만큼 거리의 예술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거리를 걷다 보면 사람들이 도로표지판 뒷면에 스티커를 붙이고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소방시설 및 도로표지판에 붙여진 스티커를 보면 공공시설이 본연의 기능을 최적으로 발휘하는 게 어렵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암스테르담이 스트리트아트의 무대가 된 건 역사적 맥락과 관련돼 있다. 네덜란드는 대마초와 매춘 등을 합법화하는 등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쪽으로 정책을 펼쳐왔다. 사회적 일탈을 엄격히 단속하기보단 혐오 표현이 아니라면 묵인하거나 수용하는 쪽으로 전략을 잡았다. 그라피티 창작이 활발해진 데엔 스쿼팅도 영향을 미쳤다. 스쿼팅은 빈 건물을 무단 점거해 작업 공간으로 쓰는 행위다. 1970년대 암스테르담에선 주거지 부족으로 빈 건물에 침입해 눌러앉아 입주민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그라피티는 빈 공간의 특성과 맞물려 주거권을 요구하는 청년들의 표현 수단이 됐다.
암스테르담 거리엔 스트리트아트만 있는 게 아니다. 구도심에 있는 렘브란트 가옥은 17세기의 생활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주거지와 나란히 늘어서 있는 안네 프랑크의 집은 관람하기 위해 사전 예약이 필수지만 전쟁의 비극을 체감하려면 들러야 할 명소다. 운하 사이에 있는 홀로코스트 추모 공간엔 10만2000여 명의 희생자 이름과 생몰연도가 적힌 타일들이 벽면을 채우고 있어 평화와 자유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암스테르담=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