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 먼 'K-오페라' … 정체성 논란 불식 못 시킨 '물의 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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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전당 자체 제작한 창작 오페라
"K-오페라 새지평 열 것"공언했지만
작곡·대본·연출 등 모두 외국인이 담당
등장인물들 대사도 모두 영어
합창·음악·무대 디자인 호평 이어졌지만
성악가들 기량에는 평가 엇갈려

오페라 물의 정령 1막의 장면 / (c) 예술의전당 제공

오페라 물의 정령 1막의 장면 / (c) 예술의전당 제공

25일 서울 예술의전당. 세계 초연작 오페라 ‘물의 정령’ 공연장에 들어서자 파도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물의 영상이 객석을 감쌌다. 예술의전당이 아르떼 뮤지엄과의 협업으로 구현한 바다 위 풍경은 관객들을 작품의 세계로 끌어들이려는 인상적인 이벤트였다. 다만 무대 위에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튜닝 소리가 겹치면서 오프닝의 존재감은 이내 사라졌다.

오프닝의 인상처럼 '물의 정령'은 다양한 무대 기법과 현대 음악으로 쓴 창작 오페라다. 작품의 완성도 부분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할만한 요소가 많았지만, 반면 아쉬운 점도 많았던 무대였다. 특히 ‘K-오페라’라는 타이틀을 너무 쉽게 획득하려고 했던 것이 아쉬웠다.

오페라 물의 정령에 출연한 왕 역 베이스 바리톤 애슐리 리치 / (c) 예술의전당 제공

오페라 물의 정령에 출연한 왕 역 베이스 바리톤 애슐리 리치 / (c) 예술의전당 제공

'물의 정령'은 2023년과 2024년 영국 로열 오페라 프로덕션의 '노르마'와 '오텔로'를 수입해 무대에 올렸던 예술의전당이 이탈리아의 라 스칼라, 영국의 코벤트 가든, 일본의 신 국립극장 같은 공연을 직접 제작해 무대에 올리는 ‘제작 극장’으로 변모할 의지를 선보이며 손수 제작한 첫 작품이다.

공연에 앞서 열렸던 지난 14일 예술의전당 제작 오페라 '물의 정령' 기자간담회에서 “K-오페라의 지평을 열겠다”는 제작진의 설명에 여러 기자가 즉각 반문했다. 호주 출신의 작곡가와 대본가가 쓴 오페라인데다 미국 출신의 연출자와 지휘자가 참여한 오페라가 ‘K-오페라’라는 타이틀을 걸기에 충분할 만큼 한국적 정체성을 담고 있냐는 것이었다. 더욱이, 해외 진출을 겨냥해 영어로 쓴 ‘물의 정령’은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렌치, 영어 등 언어를 기준으로 작품을 나눠 오던 전통적인 오페라 분류법에 거스르면서도 ‘K’라는 이니셜을 얻을만한 작품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오페라 물의 정령에서 공주의 병에 대해 논의하는 장면 /(c) 예술의전당 제공

오페라 물의 정령에서 공주의 병에 대해 논의하는 장면 /(c) 예술의전당 제공

세계 초연 당일인 2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을 본 관객들과 함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었다.

물과 시계를 소재로 한 창작 오페라 '물의 정령'은 참신한 무대 디자인과 판타지 영화를 연상케 하는 화성으로 눈길을 사로잡았으나, 전통의 오페라 기법을 따르지 않은 창작 오페라였다. ‘오페라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성악가의 독창, 즉 아리아가 등장하지 않았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푸치니가 쓴 오페라 '투란도트'의 테너 아리아 ‘Nessun dorma(아무도 잠들지 말라)'나 '라 보엠'의 ‘Che gelida manina(그대의 찬손)’등 작품을 대표하는 주요 아리아는 오페라 전체의 이야기보다 더 대중들에게 친숙한 것을 감안하면 ‘물의 정령’을 상징하는 음악을 손꼽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또, '아~' 모음으로만 노래가 이어지는 멜리즈마(가사 없이 한 음절로 음의 연결을 길게 부르는 기법)의 유려한 선율이 이어졌는데 종교음악에서 주로 쓰이는 멜리즈마 창법이 자아낸 몽환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좋았지만, 때때로 가사 없는 음악에서 지루함을 느끼기도 했다.

공주 역 소프라노 황수미 /(c) 예술의전당 제공

공주 역 소프라노 황수미 /(c) 예술의전당 제공

공연이 끝난 후, 프로덕션에 대한 현장의 반응은 엇갈렸다. 공연을 본 다수의 음악가들은 작곡가 메리 핀스터러의 음악이 “화성을 기반으로 한 현대음악으로서의 설득력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국립심포니를 이끈 지휘자 스티븐 오즈굿은 전자 음향과 오케스트라의 균형을 정교하게 조율했고, 성악과 반주의 조화를 중시한 해석으로 호평받았다.

반면, 스티븐 카르의 연출을 두고, 1막에서 공주의 병에 대해 논의하는 장면에서 여러 성악가가 아무런 동작 없이 서서 노래하는 장면들이 오래 지속된 것이 극의 전체의 흐름을 방해했다는 평가가 잇따랐다. 무대 위 성악가들의 기량에도 평가가 엇갈렸다. 출연진은 한국인 캐스팅과 외국인 캐스팅으로 구분되었는데, 공주 역의 소프라노 황수미는 뛰어난 기량과 섬세한 감정 표현으로 중심이 흐트러지기 쉬운 창작 오페라의 중심을 잡았다. 메조소프라노 김정미 역시 안정감 있는 연기를 선보이며 시계 장인 역할로 극을 이끌었다. 카운터테너 정민호(물의 정령 역)는 신비로운 음색으로 극의 분위기를 살렸으며, 베이스 김동호와 바리톤 박은원도 각자의 배역에서 부족함 없는 가창력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오페라 물의 정령의 시계 장인 역 메조 소프라노 김정미 /(c) 예술의전당 제공

오페라 물의 정령의 시계 장인 역 메조 소프라노 김정미 /(c) 예술의전당 제공

반면, 시계 장인의 제자 역을 노래한 아일랜드 출신 테너 로빈 트리츌러와 왕 역의 애슐리 리치는 대극장을 울림으로 채우기엔 부족한 성량으로 노래해 작품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전달하지 못해 몰입을 방해했다. 두 외국인 성악가의 영화배우를 연상케 하는 외모와 자연스러운 연기는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작은 성량은 오페라 무대에 서는 성악가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이날 무대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건 합창이었다. 노이오페라코러스는 물속 식물처럼 유영하며 노래하거나 때로는 어둡고 깊은 곳에 서서 영어로 쓰인 가사를 무리 없이 노래하며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혼성 합창단이 유기적인 움직임을 선보이며 극의 한 축을 담당하는 부분은 한국 오페라 합창의 수준이 한층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예술의전당 제작 오페라 '물의 정령'은 무대기술과 기악, 영상예술이 유기적으로 얽혀 탄생한 결과물이다. 전통적 방식에 국한되지 않고 영상과 조명, 전자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관객이 마치 일렁이는 물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자아내게 할 만큼 동시대의 기술력을 총동원한 작품이다. 작품을 직접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은 관객에게 바다 향을 입힌 시향 지와 프로그램 북을 포장하는 커버를 제작·제공한 것도 한국을 대표하는 제작 극장으로 변모해 해외 주요 공연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예술의 전당의 의지가 엿보이는 배려였다.

오페라 물의 정령이 한 장면 / (c) 예술의전당 제공

오페라 물의 정령이 한 장면 / (c) 예술의전당 제공

그러나 갓 태어난 작품에 ‘K-오페라’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작품의 본질적 요소에서 수많은 개선과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한 오페라 연출자는 "한국적 요소라 불릴만한 건 항아리 소품, 찰나의 거문고 연주, 2막에 잠깐 등장한 가수 싸이의 '새' 안무를 따라한 공주의 동작 정도"라며 "이 작품이 K-오페라라면 푸치니의 '나비부인'도 J-(일본)오페라라고 불러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더욱이 예술의전당은 '물의 정령'을 향후 호주, 대만, 일본 등 해외에 수출한다고 밝혔다. 한국을 대표하는 오페라로 세계 무대에 수출하려면 작품의 스토리에 한국의 역사적 자신감이 돋보여야 한다. 그런데 실제 작품 제목은 'The Rising World'이고 극 중 '물의 정령'으로 불리는 존재는 영어 자막에서 'Water Ghost'으로 번역됐다. 작품 핵심 소재인 물의 정령(물귀신)과 물시계가 한국의 상징이라며 '물의 정령'으로 공연명을 붙였던 제작진의 의도가 수출용 프로덕션에서도 유지될지 의문이 남는 대목이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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