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배송 등 그럴싸한 상황
피해자에 문제 해결법 제시
친절한 말투로 신뢰 얻은뒤
금감원·檢 사칭 심리적 압박
피해자 혼자 있게 고립시킨뒤
즉각적 행동하도록 부추겨
“고도의 심리범죄로 진화”
“신용카드가 불법적인 일에 연루됐다”는 전화 한 통에, 최기순 씨(74·가명)는 전 재산을 잃었다.
수화기 너머의 카드사 직원은 카드 발급 신청을 한 적이 없다는 최씨에게 ‘명의 도용이 의심되니 고객센터로 문의하라’고 안내했다. 의심을 품을 겨를도 없이, 최씨는 상대방이 알려준 고객센터 번호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이후 금융감독원과 검찰을 사칭한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했고, 통장에 보관 중이던 전 재산 21억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심리적 속임수를 이용해 피해자들을 압박하고 조종하면서 돈을 뜯어낸다. 피해자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행동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피싱범에게 심리적 지배를 당한다. 결국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채 개인정보와 금융자산을 모두 범죄자에게 넘기게 되는 것이다. 최근 급증하고 있는 ‘카드 배송형 사기’는 이러한 심리 조작 방식을 구현한 대표적인 사례다.
범행은 현실에서 흔히 있을 법한 상황 설정으로 시작된다. 카드 배송, 결제 오류 등 실제로 겪을 수 있는 일로 피해자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뒤, 스스로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문제 해결에 나서도록 유도한다. 이때 연결되는 고객센터 역시 피싱범의 통제하에 있는 가짜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금감원과 검찰을 사칭한 인물들이 차례로 전화를 걸어 온다. “당신의 계좌가 범죄에 연루됐다” “협조하지 않으면 구속 수사로 전환된다” 등의 말로 위기감과 공포심을 자극한다. 이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다”며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제시하고, 피해자가 이를 믿고 따르게 만든다.
이들은 피해자에게 ‘수사 기밀’이라는 이유로 비밀 유지를 강조하며 주변과의 단절을 유도한다. 급기야 모텔이나 자택 등 특정 공간에서 피해자가 스스로 고립되도록 만든다. 피해자의 스마트폰에는 악성 앱이 설치돼 원격 제어가 가능해지고, 통화 내역은 물론 112(경찰)나 1332(금감원) 등 신고 전화까지 모두 가로챈다. 마지막에는 ‘자금의 불법성 여부를 확인한다’는 명분으로 계좌에 있는 모든 자산을 이체하게 하고, 대출 가능 금액까지 털어낸 뒤 연락을 끊는다.
이러한 수법은 피해자의 감정과 사고를 점차 통제하는 방식으로 설계돼 있다. 초반에는 친절한 말투로 신뢰를 얻고, 곧이어 금감원과 검찰 등 선역과 악역 역할을 나눠 심리적 혼란을 유도한다. 도움을 주는 사람과 위협하는 사람이 동시에 등장하며 판단을 흐리게 하고, 통화 과정에서 알아낸 개인정보와 감정적 약점을 협박 수단으로 활용한다. 피해자는모든 판단을 스스로 내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피싱범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된다.
최씨도 같은 수법에 걸려들었다. 최씨는 남편이 남긴 유산인 아파트를 매도한 뒤, 새로 이사할 집을 구하기 위해 잔금 21억원을 은행 계좌에 예치해 둔 상태였다. 그러던 중 지난해 11월 카드사 직원을 사칭한 인물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본인이 발급한 적이 없는 카드가 불법 사용되고 있다는 말에 놀란 최씨는 상대가 안내하는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고, 이들은 ‘해결을 위해 원격 조종이 필요하다’며 스마트폰에 악성코드를 심었다. 곧바로 기기는 해킹돼 조직의 감시하에 놓였다.
곧이어 금감원과 검찰을 사칭한 인물들이 등장했다. 금감원 사칭범은 친절한 태도로 신뢰를 쌓았고, “선생님이 돈을 안 보내면 제가 해고된다”며 동정심을 자극했다. 검사 사칭범은 “늙으면 죽어야지” “당신 때문에 몇 년간 수사한 사건이 다 틀어졌다”고 폭언을 퍼부으며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이들은 최씨의 딸이 해외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딸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며 감정적으로 몰아붙였다.
의심을 품은 최씨가 112와 1332에 전화를 걸어보려 했지만, 이미 스마트폰은 범죄자들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사기범들은 신고 전화조차 가로챘고, 최씨는 결국 고립된 채 사기범의 지시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사기범은 은행의 의심을 피할 수 있도록 변명용 대본까지 제공했으며, 첫 전화가 걸려온 지 불과 닷새 만에 최씨의 통장에서 전 재산이 빠져나갔다.
며칠 새 최씨가 집 밖으로 나오지 않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지인이 경찰과 함께 최씨의 집을 찾아오면서 사기 피해가 드러났지만, 이미 모든 자산은 사라진 뒤였다. 충격을 받은 최씨는 단기기억상실 증세와 극심한 자책감에 시달리며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자녀 박현정 씨(48·가명)는 “아파트 잔금과 세금 등으로 쓰려고 준비했던 돈이 모두 사라져 자식들이 대출을 받아 충당했다”며 “부모님이 평생 아끼며 모은 돈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보이스피싱이 단순한 사기 수법이 아니라 감정과 판단을 정밀하게 조종하는 심리 조작 범죄에 가깝다고 분석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보이스피싱은 피해자의 불안심리를 자극해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조바심 속에서 즉흥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며 “조직은 도와주는 사람과 위협하는 사람 등을 교차해 가며 등장시켜 신뢰감과 공포심을 동시에 유도하고, 피해자가 완전히 신뢰하게 된 상태에서 조금의 의심도 없이 행동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후에도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인간의 심리적 방어기제와도 관련이 있다”며 “자신이 옳다고 믿고 행동한 뒤에는 그것이 틀렸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는 인지부조화를 피하려는 무의식적인 심리로, 스스로의 판단과 신념이 무너지는 고통을 회피하려는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