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연인이고 동지였으며 치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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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 공연 장면 / 사진. ©이모셔널씨어터

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 공연 장면 / 사진. ©이모셔널씨어터

이모셔널씨어터의 첫 작품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대본·작사 김하진, 작곡·음악감독 문혜성, 연출 박한근)는 판타지 로맨스 장르물로, 첫인상은 꽤 익숙하다. 1940년에 사는 이양희와 1980년에 사는 정해준이 만나 사랑을 나눈다는 설정이다. 직접 만날 수 없는 서로 다른 시공간에 사는 인물들이 서로를 이해함으로써 관계가 깊어지는 이야기는 안타까워서 더 낭만적인 법이다.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의 판타지 로맨스는 '인간 사이의 사랑'을 다룬다. 뮤지컬 <고스트>(2011 웨스트엔드, 2013 한국)와 <고스트 베이커리>(2024)가 그랬듯, 그리고 한국형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가 그렇듯,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사랑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는 인간 여성, 비인간 남성을 축으로 놓고 캐릭터 설정값을 변주시키는 한국형 판타지 로맨스 장르 문법을 벗어나 있다.

필연적인 만남

판타지 로맨스를 살아 있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으로 다룬 데에는 중요한 다른 의도가 있어 보인다. 역사물로 이야기의 심연을 세우기 위해서다. 특히 두 인물을 가장 첨예한 억압의 시대인 1940년과 1980년에 위치시켜 시대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관계로 심화시켰다. 당연하게도, 두 인물에게는 시대와 무관할 수 없는 결여가 있고, 이들의 사랑이 깊어지는 만큼 그 결여는 점차 사라진다. 작품의 언어로 말하면,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로 인해 '폐허 속으로 걸어가는 것'의 의미를 찾고 사랑을 완성한다.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는 균형 잡힌 구조가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는 양희와 해준 사이에 설계된 균형 감각이 만드는 구조다. 양희가 만남을 열면, 해준이 만남을 닫는다. 이 과정에서 해준의 트라우마는 양희로 인해 치유되며, 양희의 미완성 소설은 해준에 의해 완성된다. 이러한 균형 감각은 이들의 만남이 필연적이었다는 심층적 의미를 담는다.

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 공연 장면 / 사진. ©이모셔널씨어터

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 공연 장면 / 사진. ©이모셔널씨어터

일제강점기에 사는 양희는 만주에 간 아버지 대신 아시타서림을 운영하는 여성이다. 그녀에게 서림은 모든 것이다. 밖으로는 서림에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남몰래 독립운동가들을 돕고 있으며, 안으로는 로맨스 소설 작가를 꿈꾸고 있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쉽지 않다. 독립운동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고 작가 되기는 여성이 패관잡기나 쓴다는 인식을 뛰어넘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정작 양희는 지금 소설의 결론을 내고 있지 못해 힘들다. 양희는 자신이 만든 로맨스 소설 속 인물이 왜 폐허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해 고민한다.

해준은 군부독재 시대를 살고 있는 남성이다. 그는 대학 신문반에서 함께 기자로 활동하던 선배 나라에 대한 부채 의식에 갇혀 회한과 후회 속에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군부독재 반대 시위를 취재하던 선배의 죽음을 눈앞에서 직접 목격한 해준은, 그 참혹한 광경을 담았던 자신의 카메라를 신문반 아지트였던 아시타서림에 묻어두고 고통을 곱씹는다. 해준은 폐허 속으로 들어갔던 선배를 막지 못했던 자신을 끝없이 자책한다.

아시타서림을 미래서림으로

두 사람은 바로 여기, 아시타서림에서 만난다. 서가에 꽂혀 있던 양희의 미완성 소설에 해준이 코멘트를 달기 시작하며 두 사람의 고민은 40년이라는 차이를 전제한 채 서로에게 활성화된다. 폐허 속 은둔자와 같았던 해준의 코멘트는 양희가 소설의 결말을 짓는 영감의 원천이 되고 동시에 폐허의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양희의 현재를 크게 움직인다. 해준도 마찬가지다. 그는 양희를 통해 선배 나라를 지키지 못한 부채 의식을 청산한다. 과거-양희가 폐허 속으로 들어가 독립의 자양분이 된 것처럼, 선배의 죽음은 또 다른 미래를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이제 해준의 현재는 아시타서림이 아닌 미래서점에서 미래를 꿈꾸는 기자가 될 것이라고, 공연은 이야기한다.

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 공연 장면 / 사진. ©이모셔널씨어터

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 공연 장면 / 사진. ©이모셔널씨어터

하지만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는 역사를 유토피아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가령 양희는 해준이 자랑하는 1980년의 문명을 현재와의 관련성 안에서 덤덤하게 수용하며 오히려 독립된 미래에 더 큰 가치를 둔다. 해준 역시 1980년의 정치적 상황이 일제강점기 당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회의적으로 드러낸다. 두 인물이 구축하는 판타지는 이러한 점에서 현재의 리얼리티를 풍부하게 읽도록 만들어 준다. 발랄한 양희와 다소 우울감에 젖어 있는 해준의 균형감은 이처럼 공연을 흥미롭게 만든다. 그들은 서로에게 연인이고 동지였으며, 진정한 치유자였다.

최승연 뮤지컬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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