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하는 이유[이은화의 미술시간]〈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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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푸른 바탕 위에 두 개의 굵직한 회색 수직선이 솟아 있다. 회색과 갈색의 물감 자국이 화면을 거칠게 가로지르고, 형체는 곳곳에서 뭉개지고 지워졌다. 거대한 파괴의 흔적만 남아 무엇을 그렸는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2005년에 그린 ‘9월’(사진)이다. 얼핏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 테러 장면을 담고 있다. 공교롭게도 리히터는 그날 뉴욕행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테러 직후 미 영공이 통제되면서 비행기는 캐나다 핼리팩스로 우회했고, 그는 사흘 뒤 독일로 돌아갔다. 세계가 실시간 영상으로 참사를 목격하던 순간 그 역시 미디어를 통해 사건을 마주했다. 그러나 리히터는 이 거대한 비극을 곧바로 화폭에 옮기지 않았다. 당시 보도사진과 영상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참사를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몰라 4년을 고뇌했다. 2005년이 돼서야 두 번째 비행기가 건물에 충돌하는 보도사진을 토대로 붓을 들었다. 그는 먼저 장면을 선명하고 정교하게 그린 뒤 나이프로 물감을 긁어내고 문질러 형체를 지웠다. 푸른 하늘과 건물, 폭발의 흔적은 잿빛 얼룩 속으로 흐려졌고, 구체적인 사건은 추상에 가까운 이미지로 변했다. 그는 왜 선명한 역사적 장면을 다시 흐릿하게 만들었을까. 리히터가 경계한 것은 비극이 자극적인 볼거리나 정치적 선동으로 소비되는 일이었다. 보여주는 대신 지우고, 설명하는 대신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관객 스스로 비극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묻기 위해서다. 9·11테러가 일어난 지 25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도 리히터의 그림처럼 조금씩 흐려지고 모호해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의식적으로 기억해야 한다. 비극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증오를 되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은화의 미술시간 > 구독 이런 구독물도 추천합니다! 고영건의 행복 견문록 사진기자의 사談진談 기고 이은화 미술평론가©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좋아요 0개 슬퍼요 0개 화나요 0개 지금 뜨는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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