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억 원. 2019년 11월 23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낙찰된 그림 한 점의 가격이다. 경매 역사에서 한국 화가 중 가장 높은 금액에 낙찰된 <우주(Universe, 05-IV-71 #200)>라는 대형 전면 점화. 바로 김환기(金煥基, 1913~1974)의 작품이다. 미국 뉴욕에 있는 일급 화랑 포인덱스터갤러리 전시회에 출품되었던 것으로, 재미교포 의사였던 김마태 박사가 매입해 거실에 두고 감상하던 작품이 경매에 나오게 된 것이다.
다채로운 푸른빛의 점들이 마치 우주의 언어인 듯 나선형의 질서에 옴나위없이 들어차 있고 그 하나하나의 점들이 우주의 질서 안에서 생동하며 깊은 울림을 주는 두 폭짜리 대작이다. 1971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김환기가 인생의 마지막을 보낸 뉴욕 시기의 것으로, 이 시기 작품은 하늘과 바다를 연상시키는 푸른빛의 전면 점화에 방점을 찍는다. '환기블루'는 그의 화풍을 대표하는 특징이 된다. 이 독특한 푸른 색감은 어디서 온 것인가. 섬 소년이었던 김환기가 어릴 적 동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던 바다와 밤하늘. 눈에 그리고 기억에 담아 시나브로 물든 그 푸른빛의 발현은 아닐는지.
김환기는 전라남도 신안군의 섬, 안좌도(安佐島, 45.2㎢)에서 김상현(金相賢) 슬하 1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안좌도는 목포에서 서쪽으로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섬으로 동쪽의 안창도(安昌島)와 서쪽의 기좌도(基佐島)를 김환기 집안 선대에 간척 사업으로 연결하면서 각각 한 글자씩을 따서 이름 붙인 섬이다. 아버지 김상현은 안좌도 일대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며 운수 사업까지 하는 천석지기 대지주였다. 하나뿐인 아들이 가업을 이어받아 고향 섬에 안착해 살 것으로 생각했던 그는 아들이 무슨 공부를 해도 관계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932년 도쿄의 니시키시로(錦城) 중학교(5년 과정)를 마치고 섬으로 돌아왔고, 대학 진학을 꿈꾸던 김환기는 다시 일본 유학을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이 귀한 집안의 부모에게는 대를 잇는 것이 일대 숙제였으리라. 그 뜻을 어길 수 없어 19살 이른 나이에 혼인하게 된다. 귀향한 지 한 달만의 일이다. 자신은 물론이고 신부에게도 이런 혼인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세 딸을 얻었지만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 재산을 뚝 떼서 나누고 이혼하게 된다.
혼인하고 나면 대학 공부를 포기하게 될 것이라는 부모의 바람과는 달리 그는 단식 투쟁까지 하며 뜻을 관철했다. 아들이 몰래 배를 타고 나가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 미리 선주들에게 연락을 해두었지만, 김환기는 포기하지 않았다. 가까운 섬까지 바다를 헤엄쳐 건너겠다는 생각을 감행하며 화가로서의 여정을 시작한다.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던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조선미전)의 개최는 당시 조선인들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면서 미술 활동을 근대적으로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주최 측인 조선총독부는 일본 문부성의 문전(文展)이나 제국미전(帝展)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에 아카데미즘에 편중되고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선호와 맞물려, 수상작이 되기 위한 답안처럼 향토색 일색의 구성과 표현이 정형화되기도 한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순수미술 비판이 제기되고 1930~1940년대는 여러 변화의 수용으로 일본 관전의 아카데미즘부터 모더니즘의 다양한 변주까지 그야말로 혼종의 시기였다. 현대미술, 또는 전위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인 모더니즘의 유입은 주로 일본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로부터였으며 그 중심에 김환기가 있었다.
니혼대학(日本大学) 예술과 미술부에 입학해서, 기본을 터득하면서도 좀 더 명망 있는 교수의 지도 아래 다양한 미술을 접하기 위해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훗날 SPA양화연구소)에 가입한다. 이곳은 일본에 세잔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아리시마 이쿠마(有島生馬, 1882~1974), 일본식 초현실주의 화가 아베 곤고(阿部金剛, 1900~1968), 일본에서 처음으로 미래파의 영향을 받은 화가 도고 세이지(東鄕靑兒, 1897~1978) 외에도 피카소와 같이 배우며 아방가르드를 체험하고 돌아온 후지타 쓰구하루(藤田嗣治, 1886~1968)가 지도강사로 있어, 모더니즘 미술의 초석을 다지고 교류를 나누는 장이 되었다. 길진섭(吉鎭燮, 1907~1975)과 김병기(金秉騏, 1916~2022)도 같은 회원으로 활동했다.
김병기의 구술에 의하면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 건물은 현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 1887~1965) 스타일의 건축 양식이었다고 한다. 불필요한 장식은 제거하고, 간결한 선과 비례감을 강조하며, 재료의 본질을 강조하기 위해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했다는 점이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양화연구소의 외관에서 확인된다. 한편, 우주의 법칙을 수의 비례에서 찾았다면서 인체 비례를 기반으로 한 황금비율(1:1.6)의 건축물도 특징적인데, 김환기의 <구성>(1936년경)에서도 그러한 조형 실험이 잘 드러난다. 르 코르뷔지에의 아틀리에에서 근무하게 된 1세대 건축가 김중업에게 '평소에 우리들이 존경하던 코르뷔지에’라고 언급했던 서신으로 미루어보아 이 작품은 일종의 오마주인지도 모르겠다.
1935년, 3학년 졸업반 시기에는 정식화가의 등용문으로 인정받는 《이과전(二科展)》에 출품하게 된다. 문전의 경직되고 정체된 심사와 운영 방식에 반발하여 새로운 경향의 미술을 추구하던 미술가들이 문전을 탈퇴하고 만든 단체 이과회(二科會)에서 개최하는 전람회는 재야의 공모전으로서는 최대 규모였다. 22회 공모전에 <종달새 노래할 때>로 응모하여 입상자 중 유일한 조선인으로 입선하자, 1935년 9월 6일 자 『동아일보』, 10월 20일 자 『조선일보』에도 실린다.
고향에 있는 누이동생의 사진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구체적인 이미지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재현의 미술에서는 벗어나 있다. 한복을 입은 여인의 모습은 원통형으로 단순화했고 머리에 이고 있는 바구니의 알은 바구니가 뚫린 상태에서 형태를 완전히 드러내고 있다. 여인의 뒤편에 보이는 계단과 기하학적 형태의 높은 구조물이 비현실적으로 등장한다. 당시 일본의 초현실주의자들이 이상향을 나타내는 도상으로 주로 사용하던 항아리, 새알, 구름, 돌기둥, 수평선 등이 나타나는 걸로 보아 입체주의를 비롯하여 초현실주의가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추상미술을 시도한 이른 시기의 것으로 기하학적 형태를 소재로 한 작품 <25호실의 기념>(『조선일보』에는 <22호실의 기념>으로 발표됨)으로 23회 이과전에 입선하고, 백만회(白蛮会)를 조직하는 등 화단에서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다.
추상미술의 확장은 자유미술가협회(自由美術家協会, 1940년 전시 체제 아래 '자유’라는 명칭이 기피되어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미술창작가협회’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46년 원래 이름으로 돌아감)를 통해서 더 심화한다. 김환기는 자유미술가협회의 창립 멤버로 활동했으며 1939년에는 조선지부장을 맡기도 한다.
이 당시 일본의 전위 작가 중 무라이 마사나리(村井正誠, 1905~1999)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후반 제작으로 추정되는 기하학적이면서도 장식적인 <꽃>이라는 작품은 무라이 마사나리의 <가을꽃>과 소재나 구성에서 매우 비슷하다. 당시도 여전히 화풍 모색기로 순수 추상으로 작품의 변화를 보여 주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잠깐 환기할 것은 당시 모방에 대한 통념적 인식이 지금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시 서구 근대 미술 유입의 거의 유일한 창구는 일본 유학이었다. 그 안에서 창조적 변형과 적극적인 재해석의 시도도 물론 있었지만, 일본 작가들의 스타일을 모방하거나 학습하는 것이 일종의 근대 미술 습득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 모방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커지면서 변화가 생기게 된다.
평소 음악을 즐겨 듣고 바이올린에도 소질이 있었던 김환기는 1938년 자유미술가협회 두 번째 전시에 우리에게도 익숙한 작품을 출품한다. 비슷하게 반복되는 인체의 이미지를 중첩하고 직선과 곡선을 교차하면서 다양한 색면으로 구획되는 시각적 이미지에서 마치 피아노의 서정적 리듬과 운율이 느껴지는 듯한 그림 <론도>다.
론도는 같은 주제가 반복되는 동안 다른 요소들이 삽입되는 형식을 말하는 음악 용어다. 일본에서 그림에 골몰하는 사이 제대로 보지 못해 마음 아린 세 딸의 실루엣을 그려 넣은 듯 오른쪽 하단 옹기종기 모여있는 인체의 도상도 등장한다. 대상의 흔적은 남아 있고 형태를 단순화하며 음악적 요소를 시각화한 이 작품은 선구적 추상화로 평가받으면서 현재 국가등록문화유산 제535호로 지정되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 중이다.
1940년 미술창작가협회 경성전이 부민관(府民館)(현 서울특별시의회청사)에서 개최되었다. 친우인 무라이 마사나리를 비롯한 일본 작가들의 작품 39점과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이규상 문학수 등 조선 작가 작품 21점 등 총 60점이 전시되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도 폐간된 상황에서 홍보를 제대로 할 수도 없어 실망스러운 결과였지만 입체파,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추상미술까지 다양한 모더니즘을 선보였다. 김환기는 『문장』 12월호에 총평 글을 실으며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이 출품했던 작품 <소>를 극찬한다.
이중섭씨 작품 거의 전부가 소를 취재했는데 침착한 색채의 계조(階調), 정확한 데포름(변형), 솔직한 이마쥬, 소박한 환희-좋은 소양을 가진 작가이다. 쏘쳐오는 소, 외치는 소, 세기의 운향(韻響)을 듣는 것 같았다. 응시하는 소의 눈동자, 아름다운 애린(哀燐)이었다. 씨는 이 한 해에 있어서 우리 화단에 일등 빛나는 존재였다. 정진을 바란다.
-김환기, ‘구하던 1년’, 『문장』, 1940년 12월
전시회가 열렸던 부민관은 1935년 12월 부립극장으로 건립되었다.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위패를 봉안한 덕안궁이 있던 곳으로 서울의 전기사업을 독점하던 경성전기회사의 납부금을 기반으로 건축되었다.
각종 문화 예술 공연이 진행되었고 근대식 시설을 갖춘 다목적 공간이었다. 경성부에서도 손꼽히는 건물로 9층 높이의 시계탑이 우뚝하다. 국회의사당,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사용하다가 1991년부터 서울특별시의회 본관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술창작가협회 경성전이 개최되기 3년 전, 김환기의 소중한 반려자가 되는 김향안(본명 변동림)은 당시 남편이었던 시인 이상(李箱, 1910~1937)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소설가 김유정(金裕貞, 1908~1937)과의 합동 추모식을 올렸다. 역시 이곳 부민관에서의 일이다.
박주형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