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짓는 미쉐린 셰프 "요리의 쾌락은 건강한 흙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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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데 익숙하다.”

완전히 상반된 뜻을 함축한 단어로 구성된 문장은 ‘기가스’ 정하완 셰프의 요리를 경험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왔다. 그의 요리에 깃든 섬세한 뉘앙스와 뿌리 깊은 땅의 에너지를 알아차린 듯하다. 올해 미쉐린 별 하나와 그린 스타를 동시에 받으며 자신만의 창조적인 요리 세계를 인정받은 정 셰프. 그는 어떻게 새로움과 익숙함을 동시에 이끌어 낼 수 있었을까. 기가스는 한국에서는 드물게 정통 지중해 요리를 선보이는 레스토랑이다. 정 셰프가 지향하는 지중해 요리는 스페인에서 시작됐다. 2000년도 중반부터 스페인 여행을 하다가 음식에 심취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정통 지중해 요리를 선보이는 기가스의 정하완 셰프. 지난해 남산의 복합문화공간 피크닉으로 자리를 옮겼다. 올해 미쉐린 1스타와 그린 스타를 동시에 받았다.  박충열

정통 지중해 요리를 선보이는 기가스의 정하완 셰프. 지난해 남산의 복합문화공간 피크닉으로 자리를 옮겼다. 올해 미쉐린 1스타와 그린 스타를 동시에 받았다. 박충열

유럽 스타 레스토랑에서의 13년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이 스페인이에요. 지역에서 나는 제철 식재료와 육류, 해산물을 간단하게 조합해 창의적으로 풀어낸 것이 지중해 음식입니다.” 그는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요리를 선보이는 스페인 미쉐린 2스타 레스토랑 무가리츠(Mugaritz)에서 본격적으로 파인다이닝 셰프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독일로 건너가 미쉐린 3스타 라비에(La vie)에서 메뉴를 개발하며 주목받았다. 그곳에서 만난 디렉터 또한 스페인 말라가 안달루시아 출신이었다. “지중해 지역을 여행하며 다양한 음식을 먹어보고 그들의 문화를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었어요. 저에게 가장 좋은 기억을 준 음식을 만들고 있는 셈이죠.”

농사 짓는 미쉐린 셰프 "요리의 쾌락은 건강한 흙에서부터"

한국과 비할 수 없을 만큼 파인다이닝 문화가 굳건하게 형성된 유럽에서 13년간 일한 그가 서울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인생을 크게 뒤흔든 결심이었다. 게다가 2021년 서울 강남 도산공원 인근에 ‘팜 투 테이블’ 콘셉트를 내건 것은 누가 봐도 쉽지 않아 보였다. “초기에는 유명 셰프 아래서 배운 것들을 많이 답습했습니다. 손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제 요리라고 생각했겠죠. 당시 손님도 저도 만족도가 높았지만 더 열심히 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있어요. 지금은 온전히 제 요리를 하면서 자기만족도가 낮은 편입니다. 마치 매일 시험을 보는 기분이에요. 최대한 즐기면서 요리하지만 테이블에 앉은 모든 손님이 평가원이잖아요. ‘이제 내 요리다!’라고 생각한 시기가 지난해부터입니다.”

정 셰프는 2024년부터 본격적으로 ‘나답다’고 할 수 있는 요리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도산공원에서 남산 복합문화공간 피크닉으로 자리를 옮긴 시점과도 맞닿는다. 가장 큰 변화는 식재료에 대한 생각이다. 한국 기후에선 아스파라거스 토마토 같은 채소의 맛과 향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농장을 운영한다. “이탈리아에서 자란 토마토와 한국의 토마토가 다른데, 한국인에게 이탈리아 토마토로 요리해주면 맛은 있을 수 있어도 여운이 남지 않아요. 한국인은 이곳 자연의 일부예요. 한국 공기와 날씨에 적응하며 사는데 다른 것이 들어오면 이격이 생깁니다. ”

자연주의 요리의 쾌락, 건강한 땅으로부터

정 셰프가 농작물을 수확하는 와니농장은 경기 군포 수리산도립공원 자락에 있다. 산 중턱에 있는 농장은 고도가 높아 밤이 되면 서늘해져 농작물의 맛을 내는 데 유리하다. 한 주가 끝나는 일요일 레스토랑 문을 닫은 그는 곧바로 농장으로 달려간다. 와니농장 옆에는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이 있다. 정조7년 1783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가족 대대로 사용하는 종택. 그가 독일에서 비자 문제로 한국에 들어와 잠시 머물렀을 때 그에게 요리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하게 한 곳이기도 하다.

경기 군포 수리산 중턱의 와니농장에서 정하완 셰프가 재배하는 작물을 살펴보고 있다.   기가스 제공

경기 군포 수리산 중턱의 와니농장에서 정하완 셰프가 재배하는 작물을 살펴보고 있다. 기가스 제공

자연주의 요리라고 하면 흔히 ‘건강한 음식이지만 맛이 없다’는 편견을 갖곤 한다. 그는 음식에는 쾌락적인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셰프는 음식을 통해 쾌락을 줘야 합니다. 자연주의 요리가 이 정도의 힘이 있구나, 입안에서 팡 터지는 힘을 손님에게 주려고 노력해요. 그 쾌락을 주기 위해 자연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겨울이 되면 와니농장은 영하 15~20도까지 내려간다. 오랜 시간 화학비료와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은 땅에는 무수한 미생물이 겨울에도 존재하고 움을 틔울 준비를 한다. 겨우내 두껍게 쌓인 눈은 그 자체로 보온 효과와 습도를 제공하며 땅에 있는 생명에 귀한 에너지를 준다. 기가스의 겨울 테이블에는 오랜 땅의 힘을 받고 자란 작물들이 초록을 대신한다. “땅이 건강해요. 땅 냄새만 맡아도 좋습니다. 땅을 기르려면 50년에서 100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해요. 약을 사용하지 않은 땅에서 기른 작물이니 장점이 더 부각되는 것 같습니다.”

정 셰프는 인간은 자연을 제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이 화학비료와 약을 개발한 지 얼마나 됐다고 몇억 년 동안 땅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겠냐고 되묻는다. 한 밭에서 똑같은 작물을 계속 키우면 병충해가 생기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빨리 땅을 갈아엎어서 다른 작물을 심는 이유는 인간이 자연에 맞설 수 없기 때문이다.

와니농장은 유기농 인증을 받는 과정에 있다. 건강한 땅에는 뜻하지 않은 생명이 움트기도 한다. 재배가 아니라 채집도 즐길 수 있는 이유다. “5월 마지막 주부터 요리하는 즐거움이 가장 커지는 시간이에요. 손님들이 먹는 순간 고개를 돌려 주방을 바라보게 만드는 ‘눈물 콩’도 나와요.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콩이 있냐고 할 정도로 놀라워하죠.” 딸기도 5월을 대표하는 수확물이다. 제 계절에 자연 그대로 자란 딸기는 표면을 꽉 채운 커다란 씨앗으로 둘러싸여 있다. 자연 번식을 위한 딸기의 본성이다. 추운 겨울 미리 비닐하우스에서 빠르게 키운 딸기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고, 당도 또한 차원이 다르다고 말한다. “기가스의 정체성은 와니농장이에요. 미쉐린 별을 받아야 하는 주인공은 제가 아니라 부모님입니다. 제가 한국에 없었을 때도 한평생 농장을 일구고 지킨 분들이니까요.”

한지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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