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에서 우주까지…멜랑콜리는 있어도 비극은 없다 [국현열화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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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자의 ‘천년의 고가’(1961).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중반에 걸친 시기에 제작한 ‘여성과 대지’ 연작 중 대표작이다. 기하학적 형태로 구성한 화면에 땅을 파고 곡식을 심듯 짧고 굵은 붓 터치를 무수히 쌓아가며 정교한 질감을 살려냈다. ‘여성과 대지’는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 여성의 삶을 대지에 은유한 표현이다. 작가는 “나는 여자고, 여자는 어머니고, 어머니는 대지다”라고 했다. 여성의 삶을 수용하고 세 아이의 어머니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가졌던 작가에겐 아이들을 향한 모성애가 작업의 이유이자 삶의 목적이었다. 지난 5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막한 ‘MMCA 서울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에 걸렸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196×129.5㎝. 국립현대미술관(이건희컬렉션) 소장.

문득 사는 일을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지켜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오롯이 세월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한국미술이 먼저 떠오릅니다. 척박한 세상살이에 미술이 무슨 대수냐고,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데일리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그 쉽지 않았던 한국근현대미술 100년을 더듬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을 입고 더욱 깊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통해섭니다.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천에서 ‘MMCA 상설전’이란 타이틀 아래 미련 없이 펼쳐내는 300여 점, 그 가운데 30여 점을 골랐습니다. 주역을 찾진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오롯이 세월을 지켜온 작품을 우선 들여다봤습니다. ‘열화’입니다. ‘뜨거운 그림’이란 의미고, ‘식을 수 없는 그림’이란 의지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2024년 5월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은 작품이 있다. 819만홍콩달러, 당시 우리돈으로 약 14억 3000만원에 낙찰된 추상화, 바로 이성자(1918∼2009)의 ‘그림자 없는 산’(1962)이었다. 작가 경매 최고가를 쓴 이 기록은 한국 추상화 1세대 여성작가인 이성자 개인의 성취였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저평가돼 온 한국 여성작가들의 위상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이성자. 다소 낯선 이름일 수 있지만 한국과 프랑스를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했던, 그야말로 엄청난 화력을 지닌 작가다. 생전에 유화 1200여 점, 판화 720여 점, 도자기 250여 점을 남겼고, 개인전을 85회 열고 단체전에 300회 이상 참여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그의 판화와 사진 145점을, 프랑스 국립조형예술센터는 목판화와 유화 22점을 소장했고, 국립현대미술관은 판화와 회화 9점을 소장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1991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훈장을, 1999년 제7회 KBS 해외동포상을, 2009년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다. 눈부신 업적이다. 그러나 이성자의 삶이 언제나 찬란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누구나 그러하듯 그에게도 부침은 있었다.

이성자의 유년기는 윤택했다. 1918년 군수였던 아버지를 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정학을 공부한다는 조건으로 일본 도쿄의 짓센여자대학으로 유학도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이성자는 의상학을 배우며, 틈틈이 청강한 건축 수업에도 깊은 흥미를 느꼈다. 1938년 귀국한 뒤에는 집안이 정해준 외과의사와 결혼해 세 아들을 낳아 기르며 평범한 가정주부로 성실히 살아갔다.

그러나 삶은 예고 없이 방향을 틀었다. 남편의 외도로 결혼은 파경에 이르렀고 아이들과는 생이별을 해야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피란 갈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삶에 대한 의욕을 잃었다. 다행히도 이성자를 아끼던 사람들이 그를 부산으로 향하게 했고, 그곳에서 지인의 소개로 주불 영사관 서기관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로 갈 수 있는 여권을 손에 넣었다. 그제야 이성자는 결심했다. 과거의 그림자가 닿을 수 없을 만큼 먼 곳으로 떠나겠다고. 거기서 다시 살겠다고. 생존을 향한 몸부림이었다. 프랑스어 한마디 할 줄 몰랐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세 아들 향한 그리움과 바꾼 ‘그림’

“슬픈 기억과 절망을 담고 있는 내장까지도 태평양에 던져버린다는 심정”으로 파리에 도착한 이성자. 그는 경제력을 갖춘 뒤 한국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다시 돌보겠다고 다짐했다. 일본 유학시절 가정학과에서 공부한 경험을 살려 의상디자인을 본격적으로 배우기로 결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디자이너가 된다면 경제적 자립이 가능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의상디자인을 가르치던 프랑스 선생님은 이성자에게 그림을 배워보라고 권유했다. 화가로서의 잠재력을 알아본 것이다. 이성자는 또 한 번 용감하게 방향을 틀어 회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붓을 처음 잡은 지 불과 3년 만인 1956년 그는 국립 공모전에서 당선되는 쾌거를 이뤘다. 프랑스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에 호평을 보냈고, 언론에도 앞다퉈 소개됐다. 그 순간 이성자는 ‘내가 진짜 예술가가 됐구나’라는 강한 확신을 품었다. 그리고 그 확신을 동력 삼아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힘차게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씩 화가로 성장하고 있었음에도 마음은 늘 편치 않았다. 한국에 두고 온 아이들 생각이 마음 한구석을 늘 무겁게 짓눌렀다. 그리움이 깊어질수록 그는 더욱더 그림에 몰두했다. 붓을 한 번 더 움직이는 일이 곧 밥 한 숟가락 더 떠먹이는 것이라 여기며 이를 악물고 작업에 임했다. 그래선지 ‘천년의 고가’(1961)를 비롯해 당시에 그린 작품들에는 짧고 굵은 붓 터치가 무수히 쌓여 있다. 수많은 겹으로 이뤄진 물감층은 화면에 두께와 무게감을 더했고 작품은 깊고 단단해졌다. 농부가 땅을 일구듯, 어머니가 아이를 기르듯, 그렇게 그림을 그렸던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중반의 시기. 우리는 이성자의 이 기간을 ‘여성과 대지’의 시기라 부른다.

그러던 1960년대 말 이성자의 작품에 변화가 찾아왔다. 기하학적인 요철 문양이 들어간, 보다 깔끔하고 명료한 화면이 나타난 거다. 이 변화의 배경에는 1965년 한국 방문이 있었다.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열린 국내 첫 개인전은 ‘금의환향’이란 찬사를 받으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많은 이에게 이성자가 그리는 추상미술은 충격을 줬고, 미술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이성자의 ‘음과 양 75년 5월 No.1’(1975). 1970년대 추구한 ‘음과 양’ 연작 중 한 점이다. 동그란 원을 반으로 가른 요철 형태의 문양을 토대로 부드러움과 견고함, 질서와 자유, 섬세함과 웅대함, 여유와 긴장을 미묘하게 결합하던 시기다. 동양의 음양사상에서 꺼낸 한국적 이미지를 서양의 추상사조에 접목했다. 절제했지만 매혹적인 색채가 신비롭다. 캔버스에 아크릴릭 물감, 250×20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더 중요한 사건도 있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이들을 15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손길 없이도 스스로 살아갈 만큼 성장해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성자는 문득 깨달았다. 아이들을 향한 마음을 담아 붓질을 하던 ‘여성과 대지’의 시기에서 이제 떠날 때가 됐다는 것을.

후회·원망 없는 마음…무겁던 붓질 점차 가벼워진 비결

자유로워진 마음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이성자는 미국, 브라질 등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새로운 도시를 보며 화폭 위에 자신만의 도시를 건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일본 유학 중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건축이 화두로 떠오른 것이다. 그런 계기로 상상한 도시의 모습이 이 무렵 이성자의 작품에 등장한다. 동그란 원을 반으로 가른 요철 형태의 문양이다. 지난 세월 부지런히 땅을 갈았다면 이제는 이를 발판으로 자신의 세상을 지어나갔다. 훗날 그는 실제로 요철 문양을 본뜬 아틀리에를 직접 지어 작업실로 사용했다. 예술이 화폭을 넘어 삶의 실질적 공간이 된, 손에 꼽히는 예다.

1980년대 이후 이성자의 작품은 하늘, 또 우주를 향한다. 전시가 많아지면서 이성자는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는 일이 잦았다. 당시엔 러시아 상공을 비행할 수 없던 탓에 프랑스와 한국을 잇는 항로는 북극과 알래스카를 경유해야 했고, 이성자는 그 긴 여정 동안 비행기 창문 너머로 펼쳐진 눈 덮인 산과 오로라의 장관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화가답게 그 장면을 캔버스에 생생하게 옮겼다. 후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극지로 가는 길’ 연작(‘극지로 가는 길 87년 5월’ 1987 등)이다. 작품은 이전보다 더 산뜻하고 경쾌하다. 에어브러시와 아크릴을 주된 재료로 사용해 표면은 매끄럽고, 색채는 밝고 다채롭다. 여전히 요철 무늬가 등장하지만 이제는 땅을 떠나 하늘과 우주 속을 부유한다. 가볍고 자유롭다. 땅을 갈고, 도시를 짓고, 마침내 하늘과 우주를 유영하는 여정. 이성자의 예술은 그렇게 확장됐다.

이성자의 ‘극지로 가는 길 87년 5월’(1987). 1980년대부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어간 ‘극지로 가는 길’ 연작 중 하나다.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는 유목적 작가로 정체성을 고뇌하다가 극지의 허공, 밤하늘의 우주에서 합일의 가능성을 읽어낸 뒤 50년 화업의 마무리로 삼았다. 비행기 창 밖으로 본 알래스카의 극지 풍경에서 모티프를 얻어 자연에서 추출한 기하학적 형태를 달무리에 풀어놓은 듯한 색감을 만들어냈다. 캔버스에 아크릴릭 물감, 200×20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파국으로 끝난 결혼생활, 도망치듯 감행한 이주, 뜻하지 않게 시작한 그림, 평생을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살아야 했던 이방인의 삶. 이성자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마음 한편에 한이나 미움 같은 감정이 자리하고 있을 법도 한데, 그의 그림에서는 부정적인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생전에 누군가 작품이 어떻게 이렇게 명랑할 수 있는지 묻자 이성자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후회하지도 않고 남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향수와 멜랑콜리는 있을 수 있지만 비극은 없다.”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을 자유롭게 한 열쇠가 여기 있다. 후회와 원망이 없는 마음, 비극 속에 자신을 버려두지 않는 태도. 이성자의 시선을 땅으로부터 점점 하늘을 향하게 했던, 무겁던 붓질이 점차 가벼워진 비결이었으리라.

작가 이성자. 2000년대 작업실에서의 모습이다. 여든을 넘겨서도 노작가는 붓을 놓지 않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출간 예정),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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