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루에서 현실로…사우디 8.8조 달러 꿈, 왜 손절했나[딥다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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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부국 사우디아라비아가 감당하기에도 너무 원대한 꿈이었을까요. ‘비전 2030’의 핵심인 미래도시 ‘네옴(Neom)’ 프로젝트 공사가 상당 부분 중단됐습니다. 막대한 건설비를 쏟아부은 공사 현장이 거대한 공터로 남게 됐죠.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야심찬 꿈이 재정적 현실에 가로막혔는데요. 사우디는 이제 공상과학 영화 같은 미래 도시 대신 좀 더 현실적인 프로젝트에 집중하기로 전략을 바꿨습니다. 꿈에서 현실로 내려온 사우디 ‘비전 2030’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네옴은 사막의 신기루였을까. 사우디아라비아가 미래 도시 네옴 프로젝트 중 상당 부분을 중단하고, 엑스포와 월드컵 같은 현실의 이벤트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미지는 네옴의 핵심 사업인 ‘더 라인’의 조감도. 네옴 제공

네옴은 사막의 신기루였을까. 사우디아라비아가 미래 도시 네옴 프로젝트 중 상당 부분을 중단하고, 엑스포와 월드컵 같은 현실의 이벤트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미지는 네옴의 핵심 사업인 ‘더 라인’의 조감도. 네옴 제공
*이 기사는 4월 17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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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 남겨진 거대한 공터

2022년 11월 사우디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방한으로 경제계가 들썩거렸던 것 기억하시나요. 당시 국내 기업과 290억 달러 규모의 MOU가 체결됐고요. ‘제2 중동 붐’에 대한 기대가 한바탕 일었는데요.

지난달 이런 소식이 나왔습니다. 현대건설·삼성물산 컨소시엄의 ‘더 라인’ 지하터널 공사 계약 해지. 170㎞의 선형 도시 ‘더 라인’을 관통하는 고속철도용 터널 공사가 발주처 요청으로 중단된 겁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고속철도를 위해 조성된 도랑엔 바람에 날린 모래가 쌓이고, 한때 활기 넘쳤던 노동자 캠프는 유령 도시처럼 변했다’는 전직 직원의 말을 전했죠.

계약이 해지된 네옴 사업은 더 라인만이 아닙니다. 중동 최초의 야외 산악 스키 리조트 ‘트로예나’의 상징인 거대한 인공호수와 다목적댐 건설 계약도 지난달 말 해지됐죠. 이 공사는 이탈리아 건설사 위빌드가 진행해 왔는데요. 메인 댐 건설을 위해 지난해 말까지 투입된 롤러 다짐 콘크리트(CRC) 양만 무려 100만㎥에 달하는 엄청난 대공사였어요(공정률 30%). 이제 계약 해지로 인해 거대한 미완성 콘크리트 구조물만 덩그러니 남겨지게 됐죠. 역시 트로예나에서 스키 빌리지 철골 공사를 진행해 온 말레이시아 건설사 에버센다이도 얼마 전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고요.

다목적댐과 거대한 인공호수가 있는 산악 스키리조트 ‘트로예나’의 조감도. 사우디는 2029년 동계 아시안게임을 트로예나에서 개최하기로 했었지만, 기간 내 완공이 불가하단 이유로 올해 1월 개최권을 반납했다. 네옴 제공

다목적댐과 거대한 인공호수가 있는 산악 스키리조트 ‘트로예나’의 조감도. 사우디는 2029년 동계 아시안게임을 트로예나에서 개최하기로 했었지만, 기간 내 완공이 불가하단 이유로 올해 1월 개최권을 반납했다. 네옴 제공

네옴 프로젝트의 첫 가시적 성과물이었던 ‘신달라’ 아일랜드도 언제 완공될지 기약이 없습니다. 신달라는 2024년 10월 화려한 개장 파티를 열고 부분 개장했지만, 보수 공사를 위해 시설이 폐쇄됐고요. 월스트리트저널은 ‘고급 레스토랑에선 바카라 크리스털 잔과 악어가죽 의자를 창고에 실었고, 수만 달러에 달하는 23㎏ 어치의 벨루가 캐비어를 버렸다’고 최근 분위기를 전합니다.그렇다고 해서 네옴 프로젝트가 폐기된 건 아닙니다. 야시르 알-루마얀 사우디 국부펀드(PIF) 총재는 15일 5개년 투자 계획(2026~2030년)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네옴 프로젝트를 “상업적 타당성”에 따라 재조정하고 있다고 설명했죠. 당장 수익 내기 어려운 더 라인이나 트로예나 대신 부유식 첨단 산업도시 ‘옥사곤’ 완공에 우선 집중한다는 겁니다. 항만과 그린수소 플랜트가 들어서는 옥사곤은 네옴 프로젝트에서도 가장 돈이 될 만한 사업이기 때문이죠. SF 영화 같은 화려함 대신 실용주의를 택한 겁니다.

네옴의 산업도시 옥사곤의 조감도. 수에즈운하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아시아와 유럽을 있는 물류 거점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현재 항만인 ‘네온항’은 이미 운영을 시작했다. 네옴 제공

네옴의 산업도시 옥사곤의 조감도. 수에즈운하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아시아와 유럽을 있는 물류 거점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현재 항만인 ‘네온항’은 이미 운영을 시작했다. 네옴 제공

한계에 부닥친 오일머니

‘포스트 석유 시대’를 대비한다며 빈 살만 왕세자가 2016년부터 야심 차게 추진해 온 ‘비전 2030’. 그중에서도 핵심인 네옴 프로젝트가 전면적으로 재조정된 이유는 한마디로 돈이 부족해서죠. 사우디는 석유 부국이긴 하지만 오일머니에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사우디는 지난해 재정적자가 2766억 리얄(약 111조원)로 2020년 팬데믹 이후 최대였습니다. 지난해 국제유가가 배럴당 60~70달러에 머물면서 재정을 떠받친 석유판매 수입이 급감했기 때문인데요. IMF에 따르면 사우디는 유가가 배럴당 96~105달러여야만 재정 균형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 차액만큼이 고스란히 재정적자가 되는 거죠. 이를 메우기 위해 정부가 국채를 찍어내면서 국가 부채는 GDP 대비 32%로 높아졌어요. 다른 나라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지만 10년 전 12%와 비교하면 급증한 거죠.

사우디 재정을 떠받치는 건 석유 수출이지만, 지난 몇 년간 유가가 낮은 수준에 머물면서 재정 적자가 심화됐다. 이란전쟁으로 유가는 다시 올랐지만, 이번엔 수출 차질이 문제다. 아람코 제공

사우디 재정을 떠받치는 건 석유 수출이지만, 지난 몇 년간 유가가 낮은 수준에 머물면서 재정 적자가 심화됐다. 이란전쟁으로 유가는 다시 올랐지만, 이번엔 수출 차질이 문제다. 아람코 제공

사우디는 열심히 해외 투자 유치에 나섰지만, 기대만큼의 성과는 내지 못했습니다. 외국인 직접 투자(FDI) 유치의 목표치는 높았는데(2030년 연 1000억 달러), 현실은 한참 못 미친 거죠(2025년 355억 달러). 그래서 사우디 국부펀드는 국영 석유공사 아람코 지분을 일부 더 팔았고요. 이제 국내 부유한 자산가와 펀드매니저, 민간 기업에 ‘애국 투자’를 독려 내지 압박하고 나섰는데요. 그런 와중에 이란전쟁까지 터졌으니, 골치가 아플 겁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석유 수출량이 평소의 절반으로 뚝 떨어지면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요.

빠듯해진 자금 여건은 사우디를 현실주의로 돌아서게 만들었어요. 월스트리트저널이 입수한 내부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네옴은 최종 완공(2080년)까지 무려 8.8조 달러(1경3000조원)가 들어갈 거라고 하죠. 말도 안 되는 규모의 사업인 건데요. 사우디 국부펀드가 1조 달러 넘는 운용자산을 보유했다지만, 현실적으로 감당이 불가능합니다.

사우디는 네옴 프로젝트를 대폭 축소·재조정하는 동시에, 좀 더 현실적인 프로젝트에 힘을 쏟기로 했어요. 2030년 세계 엑스포와 2034년 월드컵 개최처럼 당장 코앞에 닥친 이벤트들이 먼저인 거죠. ‘미래의 꿈’ 같은 네옴과 달리 엑스포나 월드컵은 국가 신인도가 달린 현실의 약속이니까요. 이미 네옴 공사 현장에 있던 중장비들은 리야드의 공항과 경기장 건설 현장으로 대거 이동했습니다.

일상이 된 ‘비전 2030’

아마 여기까지 읽고 ‘현실성 떨어지는 망상 같은 계획이 애초에 문제’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실제로 계획이 너무 거창한데, 누구도 감히 왕세자를 말리지 못했던 게 큰 문제였던 게 맞습니다. 특히 더 라인의 경우, 빈 살만 왕세자의 SF 영화 취향에 맞추다 보니 고층 건물 두 개가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있는 희한한 구조로 설계됐다고 하죠.하지만 아주 최악은 아닙니다. 이제라도 틀린 걸 깨닫고 계획을 전면 수정했단 점에선 말이죠. 이에 대해 사우디 칼럼니스트 압둘라흐만 알 라시드는 이렇게 설명해요. “왕세자는 쫓기듯 서두르지 않고, 업적이나 언론의 시선에 크게 신경 쓰지도 않습니다. 틀에 갇혀있는 많은 지도자와는 다르죠. 2030년이 2040년이 된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요.”

2021년 직접 네옴의 더 라인 계획을 발표했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네옴 제공

2021년 직접 네옴의 더 라인 계획을 발표했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네옴 제공

사실 10년 전 서른 살의 빈 살만 왕세자가 경제개혁 청사진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다들 그게 되겠냐며 코웃음 쳤어요. 당시 왕세자를 인터뷰했던 이코노미스트지가 “급진적인 경제 개혁은 위험한 도박”이라고 지적했을 정도였죠. 사우디 정부 관료가 그걸 해낼 역량이 없고, 국민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라 봤기 때문인데요.

돌아보면 그때만 해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것 중 일부는 이미 실현됐습니다. 여성 운전이 허용되면서(2018년) 여성 노동 참여율이 대폭 상승한 게(2017년 18%→2025년 34%) 가장 눈에 띄는 변화이죠. 이미 2030년 목표치(30%)를 조기 달성했을 정도입니다. 논란이 많았지만, 이전에 없던 부가가치세를 도입하는 데도 성공했고요(2018년). 심지어 초기 5%였던 부가가치세율은 이제 15%로 높아졌어요.

무엇보다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경제를 다변화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비석유 부문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17년 35%에서 2024년 55%로 껑충 뛰었죠. 특히 관광과 엔터테인먼트 분야가 이제 사우디 경제의 성장을 이끄는 원동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리야드 메트로는 전 노선 무인 운전으로 운영된다. 세계에서 가장 긴 무인 운전 도시철도이다. 리야드 메트로

리야드 메트로는 전 노선 무인 운전으로 운영된다. 세계에서 가장 긴 무인 운전 도시철도이다. 리야드 메트로

2025년 1월 6개 노선 전 구간이 개통된 리야드 메트로는 사우디의 변화상을 실감 수 있는 현장인데요. 개통 직후부터 폭발적으로 이용객이 늘어난 이 무인 도시철도는 출퇴근 시간이면 늘 만원을 이룹니다. ‘비전 2030’이 실제로 시민의 일상을 바꾸고 있는 거죠.

관광지로 개발 중인 리야드 외곽 디리야 지구의 모습도 놀랍습니다. 이곳의 ‘부자이리 테라스’엔 세련된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한데요. 이곳에선 탁 트인 야외 테라스에 젊은 남녀가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10년 전만 해도 이건 종교경찰에 잡혀갈 일이었는데 말이죠.

리야드 근교에 조성 중인 엔터테인먼트 도시 ‘키디야’엔 세계에서 가장 크고 빠른 롤러코스터가 있는 식스 플래그 테마파크가 지난해 말 문을 열었고요. 이달 말엔 중동 최대이자 사우디 최초의 야외 워터파크 ‘아쿠아라비아’도 개장합니다.

홍해의 섬과 내륙 사막 지역을 묶어 개발한 리조트 단지 ‘더 레드 씨’는 2024년부터 이미 리조트가 운영되고 있죠. 식스센스 서던 듄스, 세인트 레지스 레드 씨 리조트 같은 초호화 리조트는 전 세계 유명 인사들이 찾는 곳이 됐습니다.

디리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앗투라이프가 있는 곳으로, 쇼핑센터가 속속 들어서며 관광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사우디 국부펀드는 비전 2030 투자 전략을 재조정하면서도 디리야 개발 프로젝트는 예정대로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디리야컴퍼니 제공

디리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앗투라이프가 있는 곳으로, 쇼핑센터가 속속 들어서며 관광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사우디 국부펀드는 비전 2030 투자 전략을 재조정하면서도 디리야 개발 프로젝트는 예정대로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디리야컴퍼니 제공

물론 네옴과 비교하면 저비용의 소박한 프로젝트라 하겠는데요. 적어도 ‘진짜 변화가 시작됐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핫스폿들입니다. 이제 비전 2030을 발표한 지도 만 10년. 화려한 조감도, 야심 찬 슬로건만이 아닌 눈에 보이는 성과가 필요한 시점이니까요.

이란전쟁으로 불확실성이 극에 달했던 3월, 사우디의 건설 계약 규모는 전달보다 450% 급증했습니다. 신기루 같은 네옴은 멈췄지만, 수도 리야드 중심으로 현실적인 건설사업은 늘어나고 있어서죠. 이 새로운 흐름이 부디 한국 기업에 또 다른 기회를 열어주길 기대해 봅니다. By.딥다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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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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