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은 결핍이 아니다[내가 만난 명문장/손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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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유리 KBS교향악단 공연기획팀장 “여백이 있는 음악은 싫증나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공연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치열하다. 정해진 시간에 연주자가 있어야 하고, 악기가 있어야 하며, 악보가 준비돼 있어야 한다. 예상하지 못한 결원이 생기면 누군가는 그 자리를 메워야 한다. 공연 시작 전까지 나의 일은 결국 수많은 변수를 통제하고 여백을 없애는 과정에 가깝다. 그런데 정작 무대 위의 음악은 때로 그 여백에서 가장 아름답다. 좋은 음악은 모든 순간을 같은 밀도로 채우지 않는다. 긴장과 이완, 강함과 약함, 소리와 침묵 사이의 대비를 통해 비로소 하나의 흐름을 만든다. 여백은 따라서 단순한 ‘비어 있음’과는 다르다. 무언가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결핍이 아니라, 모든 것이 미리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가능성에 가깝다. 음악이 다 들려주지 않은 자리에서 듣는 사람의 감각과 상상력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비창’을 들을 때면 그렇다. 마지막 악장의 거대한 감정은 끝을 향해 갈수록 오히려 가라앉고, 음악은 점점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사라진다. 그런데 음악이 끝난 뒤에도 마음은 쉽게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감동이라는 말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먹먹함 같은 것이 남는다. 하루키의 ‘여백이 있는 음악은 싫증나지 않는다’는 제목이 와닿는 것도 이 지점이다. 정작 내 삶에서는 그런 여백을 잘 두지 못한다. 일정표의 빈칸에는 약속을 넣고, 대화가 잠시 끊기면 무슨 말이라도 하고, 일이 조금 한가해지면 괜히 해야 할 일을 찾아낸다. 어쩌면 충만한 삶을 많은 것으로 채워진 삶과 혼동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음악에서 여백이 그렇듯 삶의 빈자리도 반드시 채워야 할 결핍은 아닐 것이다. 미리 정하지 않은 자리 하나쯤 남아 있는 삶도 꽤 아름다울 것 같다.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좋아요 0개 슬퍼요 0개 화나요 0개 지금 뜨는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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