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감정 그 자체로 인정하기
예를 들면 “동생이 없었으면 좋겠어” “언니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나는 엄마 없이 혼자 살았으면 좋겠어” 등과 같은 말이다. 부모는 이런 말을 들으면 속이 상한다. 얘가 왜 이런 말을 할까 걱정도 된다. 아이가 이런 말을 한 것을 잘했다고 칭찬할 수는 없다. 그런데 엄청 혼낼 일도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아이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보통 부모는 이런 말을 들으면 “너 왜 그런 생각을 해!” “그런 생각 하면 나쁜 사람이야”라고 나무란다. 그런 생각이 얼마나 나쁜 생각인지 일깨워 주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는 그저 자기 마음을 표현한 것뿐이다. 아이가 표현하는 감정이 나에게 좀 버겁더라도 감정은 그냥 감정이다. 어떤 감정도 가질 수는 있다. 엄마에게도 그렇다. 아이도 엄마에게 화가 날 수 있고, 엄마가 미울 수도 있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 감정을 말하면 이것을 그 사람의 생각이라고 본다. 그냥 그런 감정이 들었다고 말한 것을 의도를 가지고 한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다. 감정을 생각으로 바꿔 받으면 아이가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것과 그 생각의 옳고 그름을 따지게 된다. 쓸데 있는 것인지 쓸데없는 것인지도 나누게 된다. 그리고 그 생각을 고쳐주려 설명하고 설득하려고 든다. 설득이 잘 안 되면 약간 화까지 내면서 감정을 고치라고 강요한다.이런 식이면 아이가 부모에게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라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만 배는 낫다. 참 어려운 이야기지만 부모는 아이의 말과 행동을 담대하게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감정을 표현하면 감정 그 자체로 받아주려고 애써야 한다.
남편이 “나 너무 힘들어. 회사 때려치울 거야”라고 한다. 남편은 힘들다는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이것을 감정으로 받으면 “사표를 내고 싶을 만큼 많이 힘들구나. 마음이 그렇게 힘들어서 어떡해”라고 말하게 된다. 이것을 생각으로 바꾸어 받으면 “당신만 힘들어? 나도 힘들어. 이 세상에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어? 관두면 뭐 먹고 살아? 가장이 돼서 그렇게 책임감이 없어?”라고 되받아치게 된다.
아이가 “동생이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아이는 동생 때문에 너무 힘든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것을 감정으로 받으면 “우리 OO이, 많이 속상하구나” “동생 때문에 많이 힘들지?” “동생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만큼 많이 힘들었구나. 엄마가 몰랐네. 미안해”라고 말해주면 된다. 좀 더 나아간다면 “왜 그런 마음이 들었어? 뭐가 힘든지 엄마한테 말해줄 수 있어?”라고 하면서 아이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의 마음을 좀 따라가 보면 더 좋다.그렇게 해야 아이의 힘든 마음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소통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에 상처가 덜 생긴다. 함께 있으면서도 외롭다는 생각이 덜 든다.
부모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어떠한 어려운 순간이 발생해도 아이가 나를 근본적으로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면 한다. 자식은 원래 부모를 가장 좋아한다. 아빠들은 좀 서운할 수도 있지만 자식은 원래 엄마를 제일 좋아한다. 학대만 안 한다면 그렇다.
아이가 부모인 나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말을 했다면 ‘세상에서 나를 제일 좋아하는 아이가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라고 궁금해했으면 한다. 누구나 자신의 깊은 마음, 힘든 마음은 가장 가까운 사람, 의미 있는 사람에게 표현한다. 아이도 그런 것이다. 아이가 어떠한 상황에서 그 말을 했는지, 다른 사람도 아닌 나에게 그 말을 한 이유가 무엇일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아이와 대화를 하려면, 대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이라도 하려면 마음의 길을 열어야 한다. 마음의 다리가 연결돼야 한다. 그러려면 아이의 감정은 감정으로 받아줘야 한다. 감정을 감정 그 자체로 수긍해줘야 마음이 연결된다. 마음이 연결돼야 말을 할 수가 있다. 말이 먼저가 아니라 마음이 먼저인 것이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오은영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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