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넘어 美 심포니도…'프라하의 봄' 무대 장식, 그 자체로 상징성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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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의 대흥행은 일찍부터 점쳐졌다. 지난달 12일 스메타나의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이 연주된 오프닝 콘서트에는 페트르 파벨 체코 대통령을 포함한 주요 정·관·재계 인사가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형형색색의 드레스와 턱시도를 갖춰 입은 청중이 공연장을 가득 채웠고, 티켓을 구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선 루돌피눔 체츠 야외 공연장 앞에 마련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콘서트가 생중계됐다. 이 때문에 카를교, 프라하성, 블타바강의 황홀한 야경을 배경 삼아 콘크리트 바닥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마음껏 환호하며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영화 같은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등 내로라하는 유럽 명문 악단과 오랜 인연을 이어온 이 축제엔 올해 ‘미국 5대 오케스트라’(빅 파이브)로 불리는 새로운 손님들도 찾아왔다. 세계적인 마에스트로 안드리스 넬손스가 이끄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BSO)는 쇼스타코비치 서거 50주기를 기리기 위해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교향곡 11번 ‘1905년’을 연주하며 청중의 뜨거운 환호성을 자아냈다. 네덜란드 출신 거장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한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CSO)는 체코 태생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6번 ‘비극적’을 탁월한 해석으로 풀어내 기립박수를 끌어냈다. BSO, CSO가 프라하의 봄 축제를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 안토니오 파파노가 지난달 29일 체코 프라하 스메타나홀에서 열린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을 지휘하고 있다. 이날 무대에 함께 오른 바이올리니스트 리사 바티아슈빌리는 시마노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협연했다.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 제공

▲ 안토니오 파파노가 지난달 29일 체코 프라하 스메타나홀에서 열린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을 지휘하고 있다. 이날 무대에 함께 오른 바이올리니스트 리사 바티아슈빌리는 시마노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협연했다.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 제공

지난달 30일 체코 프라하 아리아 호텔에서 파벨 트로얀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 감독(41·사진)을 만났다. 바쁜 일정에도 지친 기색 없이 환히 웃으며 먼저 악수를 청한 그는 “프라하의 봄 80년 역사를 돌아보는 건 우리에게 무거운 책임이자 도전이었다”며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된 국제적인 행사인 만큼 유럽뿐 아니라 미국을 대표하는 명문 오케스트라까지 대거 참여하고, 함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큰 상징성을 가질 것으로 확신했다”고 말했다. 이어 “다양한 예술적 대화를 중시한 축제 창립자 겸 지휘자 라파엘 쿠벨리크의 정신을 이어받아 수년간 꿈꿔온 일들이 실현돼 기쁘다”고 덧붙였다.

2022년 8월 임기를 시작한 트로얀은 축제 외연 확대와 콘텐츠 강화를 빠르게 이끌고 있는 혁신적 리더다. 2023년엔 팝스타 같은 인기를 구가하는 천재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의 데뷔 무대를 성사시켰고, 지난해엔 최정상급 악단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이끄는 오프닝 콘서트를 최초로 기획해 유럽 전역의 주목을 받았다. 트로얀은 “프라하의 봄은 체코가 어려움을 겪던 시기 다른 나라와 소통하도록 하는 유일한 창구였다”며 “우리의 사명은 프라하의 봄이 세계 문화예술의 허브로 발전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20일 열린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 데뷔 무대. 네덜란드 출신 명장 얍 판 츠베덴은 이 공연에서 말러 교향곡 6번 '비극적'을 지휘했다.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 제공

▲지난달 20일 열린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 데뷔 무대. 네덜란드 출신 명장 얍 판 츠베덴은 이 공연에서 말러 교향곡 6번 '비극적'을 지휘했다.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 제공

“매년 어떻게 하면 무대 위에서 최고 품질의 예술을 완성해 낼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바로크 시대부터 21세기 음악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40년간 명성을 지켜온 지휘 거장부터 이제 막 빛을 발하는 젊은 스타까지 전부 찾아내 무대에 올려야 성에 찬달까요. 우리의 열정이 프라하의 봄 고유의 화려함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그리는 프라하의 봄의 청사진은 무엇일까. 트로얀은 “축제의 역할은 클래식 음악의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클래식 음악이 대중을 위해 존재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 그리고 이 축제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보적 경험을 선보이는 것이 목표입니다. 스메타나 ‘나의 조국’을 제대로 들으려면 프라하에 가라는 말이 있듯, 오직 이 축제에서만 100% 만끽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싶어요. 클래식을 아는 사람이라면 죽기 전 꼭 한번은 프라하의 봄 축제에 가고 싶단 생각이 들 만큼요.”

"20년 만의 공연 설렜다…음악제, 체코의 보석"
LSO 상임지휘자 안토니오 파파노

‘20년 만의 귀환.’ 한스 리히터, 에드워드 엘가, 클라우디오 아바도, 발레리 게르기예프 등 전설적인 지휘자들이 이끌어 온 120여 년 역사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가 긴 세월 끝에 ‘프라하의 봄’으로 돌아오는 뜻깊은 자리도 마련됐다. LSO는 1965년 게오르그 솔티 지휘로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치른 뒤 2005년 콜린 데이비스와 함께 오프닝 콘서트를 맡았을 만큼 프라하의 봄 축제와 깊은 인연을 맺은 악단이다.

유럽 넘어 美 심포니도…'프라하의 봄' 무대 장식, 그 자체로 상징성 크다

지난달 29일 체코 프라하 스메타나 홀에서 공연을 마친 LSO 상임지휘자 안토니오 파파노(66)는 인터뷰에서 “프라하의 봄 축제는 ‘체코의 진정한 보석’”이라며 “오랫동안 지켜온 문화예술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는 이 축제에서 많은 오케스트라와 서로 다른 해석, 연주를 공유하는 일 자체가 매우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에서 베를리오즈, 시마노프스키, 슈트라우스 작품을 선보인 그는 “20년 만의 공연인 만큼 부담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전달하고 작품 하나하나를 면밀하게 연구하는 것에만 집중했다”고 했다.

“‘해적’ 서곡 연주 때는 ‘악단을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을까’에 관한 고민이 많았고, ‘영웅의 생애’ 지휘 때는 ‘어떻게 하면 악단의 자신감을 극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때로 작곡가들이 악보에 적어둔 것 중 일부는 불가능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에 가까워지기 위해 계속 시도하는 게 지휘자의 의무니까요.”

파파노는 런던 코번트가든의 로열오페라하우스,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등을 지낸 지휘 거장이다. 지난해 명지휘자 사이먼 래틀의 뒤를 이어 LSO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그는 “LSO를 이끄는 건 내 인생의 큰 행운이자 축복”이라며 “하나의 스타일로 고정되지 않고, 스스로 끊임없이 음악을 재창조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로 만드는 것이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라고 말했다.

“런던 심포니는 페라리 같은 놀라운 추진력과 유연성, 뛰어난 리듬감을 지녔습니다. 전 악단의 사운드를 세밀하게 매만지는 것에 집중하면 되죠. 이건 정말 환상적인 모험입니다. 저와 악단의 음악 세계가 만나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일은 그 어떤 것보다 신비롭고 멋지거든요.”

경이로운 대우주의 울림…90분 숨죽인 비치코프의 천인 교향곡
프라하의 봄 80주년 폐막 공연 '말러 교향곡 8번'

“지금까지 나의 모든 작품은 교향곡 8번에 비하면 전주곡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는 틀림없이 내가 남긴 가장 거대한 작품입니다. (영감이 찾아온 건) 마치 번개가 치는 듯한 환상과도 같았습니다. 눈앞에 전체 악곡이 순식간에 펼쳐졌고, 난 그것을 그저 받아 적기만 하면 됐습니다.”

후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거장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1860~1911)가 자신의 교향곡 8번에 대해 남긴 말이다. 마치 신들린 것 같은 경이로운 경험을 마주했다는 그의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말러 교향곡 8번은 1910년 독일 뮌헨에서 초연됐을 당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단원, 솔리스트 등 동원된 인원만 1000명을 넘어 ‘천인(千人) 교향곡’이라는 별칭이 붙었을 만큼 대단한 규모를 자랑한다. 연주 시간만 1시간30분에 달하는 이 대작을 전부 스케치하는 데 걸린 시간이 단 3주에 불과했다는 건 초월적인 힘을 통해 작업했다는 말 외엔 설명할 수 없다.

말러는 평소 자기 작품에 대해 평가하거나 설명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지만, 교향곡 8번만큼은 예외였다. 곡을 완성한 직후 “우주 전체가 울리기 시작하고, 그 소리가 메아리치며 퍼져나가는 것을 상상해 보라. 더 이상 인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오직 행성과 태양이 회전하는 소리만 존재한다”고 말한 일화에서 말러가 이 작품에 애정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올해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 클로징 콘서트에서 이 신비로운 교향곡이 연주된다는 소식은 현지에서 큰 화제가 됐다. 말러가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나라 체코에서 최고의 권위를 뽐내는 무대에 그가 가장 특별하게 여긴 작품이 울려 퍼진다는 상징성 때문이다. 말러가 자신의 교향곡 7번을 직접 지휘해 세계 초연했을 정도로 깊이 신뢰한 악단인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은 것 또한 공연에 대한 기대를 높이는 요소였다.

시공간 초월한 상상력으로 완성한 ‘音의 황홀경’

지난 2일 체코 프라하 스메타나홀에 놓인 30㎝ 높이의 포디엄에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 거장 세묜 비치코프가 올랐다. 2018년부터 체코 필하모닉 음악감독을 맡은 그는 지난해 굴지의 클래식 전문지 그라모폰이 선정한 ‘올해의 오케스트라’, 올해 BBC 뮤직 매거진 어워즈 ‘오케스트라’ 부문 수상 등 이 악단의 영광을 이끈 명장이다.

지난 2~3일 오베츠니 둠(시민회관) 스메타나홀에서 열린 클로징 콘서트. 말러 교향곡 8번 ‘천인 교향곡’이 연주됐다.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 제공

지난 2~3일 오베츠니 둠(시민회관) 스메타나홀에서 열린 클로징 콘서트. 말러 교향곡 8번 ‘천인 교향곡’이 연주됐다.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 제공

무대에는 체코 필하모닉을 비롯해 프라하 필하모닉 합창단, 브르노 체코 필하모닉 합창단, 쿤 어린이 합창단, 여덟 명의 솔리스트(소프라노 사라 베게너, 카테리나 크네치코바, 미리암 쿠트로바츠, 메조소프라노 슈테파니 이라니, 제니퍼 존스턴, 테너 데이비드 버트 필립, 바리톤 아담 플라체트카, 베이스 데이비드 리) 등이 올랐다.

지휘자 비치코프는 전통적인 4악장 구조를 벗어나 라틴어 성가로 이뤄진 1부와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에서 주인공의 영혼이 구원을 얻는 장면을 그린 2부로 구성된 이 작품의 표제적 성격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데 몰두했다. 그는 첫 소절부터 강렬하면서도 매서운 두 합창단의 음향을 불러내는 동시에 억압된 무언가로부터 터져 나오듯 엄청난 힘의 금관과 오르간 사운드를 끌어냈는데, 이는 적절한 생동감을 갖추면서도 조화로운 도입부를 펼쳐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비치코프 손짓 멈추자…관객서 뜨거운 환호성

처음부터 찬란한 에너지가 쏟아진 1부와 달리 2부는 약간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스산한 기운으로 시작됐다. 짜임새와 구성이 복잡해 자칫 난잡하다는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작품이지만, 비치코프는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악구의 흐름을 긴밀히 조형하면서 시종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했다.

전체 구조에 있어선 상당한 절제를 발휘하면서도, 세부 표현에 있어선 말러 특유의 대담한 감정선을 충실히 드러내며 입체적인 음향을 빚어냈다. 소프라노 사라 베게너, 카테리나 크네치코바 등 파우스트를 향한 용서를 구하는 솔리스트들은 때론 날카로우면서도 차가운 음색으로, 때론 부드러우면서도 무게감 있는 울림으로 말러의 다채로운 악상을 전면에 드러냈다.

유럽 넘어 美 심포니도…'프라하의 봄' 무대 장식, 그 자체로 상징성 크다

무대 뒤편에서 등장한 성모 마리아 역의 소프라노 미리암 쿠트로바츠가 파우스트를 구원하며 내뱉는 단 두 줄의 대사에선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듯 맑으면서도 유연한 고음 처리와 고풍스러운 음색이 두드러졌는데, 그 아래를 바이올린과 하프가 섬세한 음향으로 빈틈없이 채우면서 경건하면서도 고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비치코프는 작품 전경과 후경을 담당하는 악기군의 대비를 정확히 짚어내는 동시에 음향의 범위를 서서히 넓혀가면서 벅찬 환희 속으로 고조되는 말러를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아주 얇은 천을 차례로 덧대듯 섬세하게 변화하는 소리의 명도와 악상, 거역할 수 없는 힘에 밀려 쏟아지듯 자연스럽게 불러내는 거대한 음향은 마치 광활한 우주에 몸이 뜬 채로 은하수를 바라보는 것 같은 압도적 경험을 선사했다.

비치코프가 공중에 띄운 손을 마침내 멈추자, 1200여 명의 청중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뜨거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렇게 시작된 기립박수는 음악가들이 모두 무대를 떠날 때까지 10여분간 쉼 없이 이어졌다.

“말러가 이 교향곡에서 진정으로 의도한 건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를 음악으로 재창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마치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듯 시공간을 넘나들 듯 음악을 구상했고, 인간의 경험을 초월하는 상상력으로 악보를 써냈습니다. 말러의 우주를 생생하게 불러오는 게 우리의 도전입니다.”

비치코프가 공연을 앞두고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한 말이다. 그의 표현처럼 체코 필하모닉이 그려낸 말러의 우주는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강렬한 에너지와 고요하고도 평온한 적막을 끊임없이 오가며 내면에서 거대한 파도가 일렁이는 듯한 신비로운 감정을 불러냈다. 마치 119년 전 말러가 마주한 그 순간의 감동을 그대로 불러내듯이.

프라하=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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