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소설 <소오강호>에 등장하는 ‘동방불패’는 압도적 기량과 카리스마로 군림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동방’은 다르다. 한국과 일본, 중국, 대만 등 동방 국가들은 수출 경쟁력을 앞세워 세계 제조업의 중심을 서방에서 동방으로 옮겨놓았다. 이제 동방의 시선은 ‘남방’, 즉 ‘글로벌 사우스(신흥·개발도상국)’로 향하고 있다.
다만 글로벌 사우스 시장은 과거와 다른 접근법을 요구한다. 이들은 단순한 공급자가 아니라 시장 규칙을 새로 설계하고 표준을 만들어갈 동반자를 찾고 있다. 글로벌 사우스를 단순히 차기 수출 전선이 아닌 ‘함께 키우고 성장하는 협력의 장’으로 봐야 하는 이유다. 과거 동방 국가들이 상품만 공급하는 판매자에 가까웠다면 남방에선 현지화 전략을 통해 시장 안에서 함께 성장할 방법을 모색하는 게 중요하다.
선진국 시장은 ‘완성된 규칙’이 지배하지만, 글로벌 사우스에선 ‘규칙 설계자’가 될 기회가 펼쳐지고 있다. 최근 브라질 등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은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공급망을 안정화하기 위해 과감한 제도 혁신과 정책 재설계에 나섰다. 새 기준을 함께 설계할 여지가 크다는 뜻이다.
의료보건 분야에서 브라질이 운영 중인 PDP(생산개발파트너십)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브라질은 해당 분야 기술이전과 현지 생산을 수출국에 요구하는 대신 장기 공급 기회와 안정적 시장 진입의 발판을 제공 중이다. 특히 규칙 설계 단계부터 기업이 참여할 경우 협상 지형도 달라진다. 결코 가벼운 조건은 아니지만, 기술이전 범위를 조율하고 위탁생산 등을 병행하면 기업 부담을 낮추고 실익을 키울 수 있다. 핵심은 규칙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기업들이 합류하는 것이다.
현지화 전략은 시장 진입권을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비용이다. 팬데믹을 거치며 브라질과 멕시코 등 주요 생산 거점국들은 효율성뿐 아니라 위험 분산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세제 혜택과 현지 조달을 요구하며 자국 내 생산과 공급망 내재화를 강하게 유도하게 된 배경이다.
다만 생산 기반을 구축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 인센티브 때문만은 아니다. 시장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 위해서라도 기업은 현지에 생산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브라질의 높은 관세와 로컬콘텐츠 규제를 고려할 때 현지화 조건을 갖춰야 비로소 경쟁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시장 성장에 기여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각국에 전달해 현지에서 가장 중요한 신뢰 자본을 쌓는 길이기도 하다.
국내 기업의 현지화는 경쟁자를 차단하는 진입장벽도 된다. 현지에 생산·공급 기반을 구축하면 정부와 바이어의 신뢰를 얻고 현지 협력망을 공고히 할 수 있다. 단순한 시장 선점을 넘어 후발 주자가 쉽게 모방하기 어려운 구조적 장벽을 만드는 셈이다.
물론 현지화가 만능은 아니다. 초기 투자와 운영상 리스크, 규제 정책 변화 등을 주시해야 한다. 결국 승부를 가르는 건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뿌리내릴지를 가려내는 전략적인 선별력을 갖추는 것이다.
설계도가 다시 그려지는 시장이 글로벌 사우스를 중심으로 열리고 있다. 도면 위 더 큰 공간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치열하다. 국내 기업은 리스크를 감수하며 관계를 쌓고 우리만의 공간을 설계해야 한다. 규칙 설계자가 될지, 후발 주자가 될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권준섭 상파울루무역관장

4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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