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이 일상이 될 때[이은화의 미술시간]〈438〉

3 weeks ago 31

회색 하늘 아래 수면은 잔잔하다. 물가 건물 앞에서는 두 여인이 대화를 나누고, 작은 배 한 척이 지나간다. 얼핏 평화로운 강변 풍경 같지만 어딘가 이상하다. 길은 사라졌고 나무는 물속에서 솟아 있으며, 거리에는 배가 오간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알프레드 시슬레가 1872년에 그린 ‘포르마를리의 홍수’(사진)다.1872년 12월 실제로 센강이 범람했다. 파리 서쪽 마을 포르마를리가 물에 잠기자, 인근에 살던 시슬레는 현장으로 향했다. 그는 홍수로 달라진 마을 풍경을 관찰하며 이 그림을 포함해 네 점의 연작을 남겼다. 화면 속 건물은 와인 상점이고, 침수 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그 앞에 서 있다. 신화 속 노아도, 사람들을 구하는 영웅도 없다. 물에 잠긴 작은 마을과 상점, 주민과 배가 있을 뿐이다.시슬레의 그림은 이전 시대의 재난화와 다르다. 서양미술에서 홍수는 오랫동안 성경 속 ‘대홍수’로 그려졌다. 신의 심판이나 자연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함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시슬레는 현실의 사건을 담담히 회화의 주제로 끌어들였다. 근대미술의 주인공이 신과 영웅에서 평범한 시민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더 인상적인 것은 재난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다. 화면 어디에도 절규하거나 물에 휩쓸리는 사람은 없다. 주민들은 대화를 나누고 배를 타며 달라진 환경 속에서 일상을 이어간다. 거대한 파국으로 묘사되던 재난이 어느새 사람들이 견디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의 풍경이 된 것이다.150여 년 전 풍경은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 기후위기로 극한호우의 위험이 커지고 도시 침수가 반복되는 시대다. 매일 지나던 길과 상점, 평온했던 집도 어느 순간 재난의 현장이 될 수 있다. 시슬레의 그림은 우리가 당연하게 누려온 평온한 일상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있는지를, 그리고 누구나 재난의 당사자가 될 수 있음을 일깨운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좋아요 0개 슬퍼요 0개 화나요 0개 지금 뜨는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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