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지상의 고통을 위로하는 김혜순의 바닷속 환상 연가

1 week ago 8

[책마을] 지상의 고통을 위로하는 김혜순의 바닷속 환상 연가

“내 몸에서 내 몸이 돋아나올 때/ 내 몸이 세상 전체일 때 (…) 나는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내 몸에서 끝없이 돋아나는 천 개의 줄”(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중)

‘죽음의 시학’ 중견 시인 김혜순(사진)이 3년 만에 신작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로 돌아왔다. 미발표작 65편, 작가 편지, 대표작 영역시 등이 담긴 저자의 열다섯 번째 시집이다. 문학동네 계열사 난다의 시인선 첫 책으로 한정판 미니 북 동시 출간, 육필 사인 책갈피 증정 등 마케팅에 공을 들였다. 일반적인 시집처럼 추천사와 해설을 싣지 않고 저자의 작품으로만 책을 엮어낸 점도 이색적이다.

총 8부로 구성된 시집은 주로 지상과 심해를 대비하며 ‘자유 세계’로의 지향을 노래한다. 땅 위에 선 것들은 반복되는 노동과 갈등으로 피로하다. 하늘을 나는 새도, 빛나는 별조차도 인간의 시선을 걷어내 보면 “집을 잃고 우왕좌왕”하며 “하나하나 다 아픈” 존재들이다. 반면 끝없는 심연의 바닷속은 나의 몸이 확장하는 무한 시공이다. 인종·성별·미추 등 지상에서 경계와 선입견을 만들어 온 사회적 잣대도 “바닥이 없는 바다”로 침잠하게 되면 힘을 쓰지 못한다.

[책마을] 지상의 고통을 위로하는 김혜순의 바닷속 환상 연가

이번 시집에 있어 김혜순에게 바닷속이란 “온전히 자신에 관한 꿈만 꾸는” 안식처이자 “마음껏 리듬을 타면서/ 짐승에서 물고기가 되어가는 듯”(시 ‘나 있던 곳’) 정체성을 회복하는 공간이다. 꽤 여유롭게 흐느적거리며 심해를 유영하는 말미잘과 해파리는 누구의 규정도 받지 않고 ‘내 갈 길 알아서 가는’ 독립된 자아의 표상이다. 그들이 연주하는 “물속의 소프라노/ 투명한 입술 속에서 투명한 문장들”(시 ‘해파리 하우스’)은 슬픔에 가라앉은 우리를 위로한다.

‘여성과 몸의 수난사’에 천착해 온 김혜순의 사유는 신작에서도 예리한 감각을 발휘한다. 홀로 견디는 월경의 고통, 결혼과 출산이 갖는 의미, 할머니들의 처연한 투병 등 온몸으로 관통하는 ‘여성의 역사’를 반추한다. 재난을 겪는 외국 위로 여행객을 싣고 날아가는 비행기, 과거 고문실로 쓰인 미술관에서 즐기는 예술 감상 등 ‘망각의 역설’을 화두로 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전작의 세계에서처럼 죽음의 그림자를 끌고 오기보다 편견 없는 사랑의 가능성을 생각해본다. 가식의 껍데기를 남김없이 해체하고도 우리는 존재의 민낯을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을지. “나는 무엇을 사랑했을까? (…) 나는 당신의 혀뿌리도 목구멍도 달팽이관도/ 사랑했을까?”(시 ‘망상의 세계가 구축되는 방식’)

“이 시들을 쓰면서 고통도 슬픔도 비극도 유쾌한 그릇에 담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답니다.”(산문 ‘김혜순의 편지’) 김혜순 특유의 ‘환상 변주곡’에 등장하는 해양생물과 수생식물은 표정도 얼굴도 강요받지 않은 채 우리네 고상한 인간 세계를 자유롭게 흘러내린다. 이 시집을 다 읽고 나면 고독으로 굳어가던 당신의 심장마저도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를 따라 아득한 심해의 저편으로 떨어져 버릴지 모르겠다. 말미잘의 영문명은 ‘Sea Anemone’, 바다에서 피어나는 바람꽃 ‘아네모네’다. 꽃말은 ‘속절없는 사랑’. 지난여름 아시아 최초 독일 국제문학상 수상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 김혜순이 펼쳐내는 ‘사랑과 위로의 꽃다발’을 한 아름 받아보자.

신승민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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