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필요 없는 일[내가 만난 명문장/조승리]

2 days ago 6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중

조승리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저자

조승리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저자
클레어 키건은 아일랜드 작가로 간결한 문장 속에 무수한 감정을 담아내는 글을 쓴다. 나는 단어 하나 낭비하지 않는 그녀의 문장을 경애한다. 넘치지 않는 감정에 탄복한다. 나는 보이스웨어를 활용해 이 작품을 읽었고 점자로 재독했다. 촉각을 이용한 독서였는데도 불구하고 소설 속 인물들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그건 처음 겪어 본 생경한 경험이었다. 지난봄 시각장애 동료들과 서울 여의도 봄꽃 나들이에 나섰다. 숲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매화꽃에 코를 대고 꽃내음을 음미했다. 손으로 조팝나무 가지를 쓰다듬었다. 꽃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찬란한 봄의 색이 내 텅 빈 눈동자 속에 형상이 되어 맺혔다. 멀리서 아카펠라 공연이 시작됐다. 흥겨운 리듬을 따라 어깨를 들썩이며 걸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꽃잎이 뺨을 간질였다.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서 손을 뻗어 여린 벚꽃을 더듬어 볼 때였다. “저 사람들은 왜 꽃을 쥐어뜯고 있다니!” 싸늘한 냉소였다. 벚꽃을 만져보던 눈먼 이들이 화들짝 놀라 손을 거뒀다. 그중에는 나도 있었다. 손끝이 불에 댄 듯 화끈댔다. 화르르 불꽃이 가슴에 옮겨붙었다. 참담한 울분이 날 선 언어로 튀어나오려 했다. 그때 상냥하고 고요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나를 멈춰 세웠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봄볕이 머리를 가만가만 쓸어 주었다. 나는 분개하지 않았고 변명을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내 눈먼 동료들의 가슴에 사정 모르는 이가 내뱉은 시린 질책 대신 봄날의 따사로운 기운만이 남아 있길 바랐다.

조승리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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