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중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서 손을 뻗어 여린 벚꽃을 더듬어 볼 때였다. “저 사람들은 왜 꽃을 쥐어뜯고 있다니!” 싸늘한 냉소였다. 벚꽃을 만져보던 눈먼 이들이 화들짝 놀라 손을 거뒀다. 그중에는 나도 있었다. 손끝이 불에 댄 듯 화끈댔다. 화르르 불꽃이 가슴에 옮겨붙었다. 참담한 울분이 날 선 언어로 튀어나오려 했다. 그때 상냥하고 고요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나를 멈춰 세웠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봄볕이 머리를 가만가만 쓸어 주었다. 나는 분개하지 않았고 변명을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내 눈먼 동료들의 가슴에 사정 모르는 이가 내뱉은 시린 질책 대신 봄날의 따사로운 기운만이 남아 있길 바랐다.
조승리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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